목숨 부지해야만 했던 가난의 상황서 만연
부러울것없는 재벌3세·연예인 '정신적 빈곤'
121년전 아편빠진 간수처럼 '기가 찰 노릇'
조선이 망해가던 19세기 말엽, 백범 김구(1876~1949)가 인천의 감옥에서 옥살이하던 시기에도 마약은 넓게 퍼져 있었다. 김구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들을 단죄하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뒤 체포돼 외국인 관련 사건을 전담하는 인천에서 감옥을 살았다. 당시 백범의 부모와 인천의 여러 인사들이 그를 풀어달라면서 백방으로 노력했다. 사형선고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을 뿐 석방되지는 못했다. 더 큰 일을 위해 백범은 감옥 탈출을 결심했다. 1898년 3월, 당시 23세이던 백범은 탈옥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다. 같이 탈옥하기로 한 죄수에게 많은 돈을 들여오도록 했다. 그리고 고향 해주에서 옥바라지를 위해 인천에 와 있던 부친에게는 한 자 길이의 단단한 창을 만들어 옷 속에 감추어 넣어 달라고 했다. 창은 벽돌을 뜯고 땅굴을 파기 위한 거였다. 돈으로는 옥살이하던 80여명의 죄수들에게 음식과 술을 먹여 취하게 할 요량이었다. 또 하나가 있었으니, 마약이었다. 간수 중에 아편쟁이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가 근무하는 날을 거사 일로 택했다. 그에게 준비한 돈을 찔러주면서 아편을 실컷 사다 먹으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죄수들은 술에 취해 노래하고 떠들고 난리도 아니었으며, 혼자서 밤새 감옥을 지켜야 하는 간수는 아편에 취해 인사불성이었다. 이때를 노려 탈출로를 뚫었다. 인천에서 서울로 빠져나가는 게 쉽지 않았지 감옥에서 나가는 것은 오히려 식은 죽 먹기였다. 간수에게 먹인 아편이 백범에게는 '인생 2막'을 열어준 결정적 요인이었으나 감옥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완전히 망하게 한 거였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인천에는 마약중독자 치료소라는 기관이 생겨났다. 인천시립보건소 병설이었다. 1957년도에 이곳에서 치료받은 마약중독자가 235명이나 되었다. 당시 보건소를 다녀간 결핵 환자가 350명이었던 점에 비춰보면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마약에 빠져 있었던 거였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그리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황폐한 사회에서 트라우마에 휩싸인 사람들은 정신적 위안을 마약에서 얻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마약은 빈곤의 상황에서 만연하고는 했다. 김구가 탈옥을 결심한 기울어가던 조선사회가 그랬고, 한국전쟁의 혼란기가 그랬다. 그 틈바구니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이들에게 무슨 크나큰 희망이 있었겠나 싶다. 마약은 그러한 처지를 비집고 침투한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풍요한 요즘 사회에 퍼지는 마약은 정신적 빈곤을 파고들고 있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을 재벌 3세나 유명 연예인들이 마약에 빠지는 것은 그들의 정신적 빈곤이 그만큼 크다는 점을 방증한다. 마약 범죄가 국가를 좀먹는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 왔다. 임시정부를 세우고, 중국을 유랑하며 그 적통을 지켜낸 백범이 볼 때 마약에 취한 지금의 우리 사회는 121년 전 아편에 빠졌던 그때 그 간수처럼이나 기가 찰 노릇이다.
/정진오 인천본사 편집제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