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판에서 봉지 쌀을 팔던 소년이 성공해 희수의 나이(77세)에 생의 찬가를 불렀다.
충남 예산군에서 열다섯 살에 인천 부평으로 이사와 허름한 '하꼬방'(판잣집)에서 둥지를 튼 조진형 전 의원의 삶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와 눈길을 끈다.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그였지만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깃거리를 담은 책을 발간하기는 처음이다. 정치하는 동한 숱한 권유가 있었지만, 손사래 친 그다.
올해 희수를 맞은 특별한 해였을 일까. 공교롭게 부인과 백 년 가약한 지 50년 되는 해다. 희수면서 금혼식이라는 의미를 살려 '가족이 힘이다'라는 메시지를 남긴 이 책은 소량만 발간해 가족·친지들에게만 돌렸다고 한다.
부평 사람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조진형'.
그는 이 책에서 쌀 배달꾼에서 시작한 자신의 성공 신화, 즉 삶의 여정이 담긴 부평에서 일어난 소소한 이야기들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그가 부평에 이사한 것은 15살 되는 해였다. 그는 방 하나에 좌판이 딸린 집에서 봉지 쌀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고, 고1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야간학교(송도고등학교)로 옮겨 소년 가장 역할을 했다.
아버지 고향의 첫 글자인 '덕'자와 할아버지 존함의 '원'자를 따서 지은 '덕원상회'는 그가 '주경야독'으로 일궈낸 터전이다. 쌀가게 청년에서 미곡상 청년 사장으로 도약한 원천이었다.
70년대 종돈 사업으로 업종을 확대하면서 행운을 얻은 그는 80년대 부평수출공업단지가 생겨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자 '진선미 예식장'을 건립했고, 예식장 사업 때문에 시작한 주례만도 3천300쌍에 이르는 흥미로운 기록을 가지고 있다.
양돈사업을 하면서 부평고 씨름단을 만들어 원 없이 고기를 먹였던 기억과 그로 인해 전국을 제패한 기록도 생생하게 그렸다. 이밖에 부평 관내 재래시장 얘기와 인천 북구가 아닌 부평구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게된 정치적 비사도 그가 진정한 부평사람임을 느낄 수 있는 대목.
무엇보다 지역사회 활동으로 쌍둥이 학비를 주면서 시작한 장학 사업은 지금도 2차례 40억 원을 쾌척해 운영할 정도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정치 이야기로는 "오랜 기간 백인들의 핍박과 폭력 속에 살았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정치 보복을 하지 않았다"는 코멘트가 인상적이다. 쌀 가게에서 배달청년에서 사업가로, 지역사회 활동가에서 정치인 중 재산신고 1위권에 오를 정도로 성장한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그가 이런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힘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이제 내가 더 잘할 차례'라는 독백을 남기고 글을 마감했다.
충남 예산군에서 열다섯 살에 인천 부평으로 이사와 허름한 '하꼬방'(판잣집)에서 둥지를 튼 조진형 전 의원의 삶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와 눈길을 끈다.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그였지만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깃거리를 담은 책을 발간하기는 처음이다. 정치하는 동한 숱한 권유가 있었지만, 손사래 친 그다.
올해 희수를 맞은 특별한 해였을 일까. 공교롭게 부인과 백 년 가약한 지 50년 되는 해다. 희수면서 금혼식이라는 의미를 살려 '가족이 힘이다'라는 메시지를 남긴 이 책은 소량만 발간해 가족·친지들에게만 돌렸다고 한다.
부평 사람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조진형'.
그는 이 책에서 쌀 배달꾼에서 시작한 자신의 성공 신화, 즉 삶의 여정이 담긴 부평에서 일어난 소소한 이야기들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그가 부평에 이사한 것은 15살 되는 해였다. 그는 방 하나에 좌판이 딸린 집에서 봉지 쌀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고, 고1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야간학교(송도고등학교)로 옮겨 소년 가장 역할을 했다.
아버지 고향의 첫 글자인 '덕'자와 할아버지 존함의 '원'자를 따서 지은 '덕원상회'는 그가 '주경야독'으로 일궈낸 터전이다. 쌀가게 청년에서 미곡상 청년 사장으로 도약한 원천이었다.
70년대 종돈 사업으로 업종을 확대하면서 행운을 얻은 그는 80년대 부평수출공업단지가 생겨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자 '진선미 예식장'을 건립했고, 예식장 사업 때문에 시작한 주례만도 3천300쌍에 이르는 흥미로운 기록을 가지고 있다.
양돈사업을 하면서 부평고 씨름단을 만들어 원 없이 고기를 먹였던 기억과 그로 인해 전국을 제패한 기록도 생생하게 그렸다. 이밖에 부평 관내 재래시장 얘기와 인천 북구가 아닌 부평구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게된 정치적 비사도 그가 진정한 부평사람임을 느낄 수 있는 대목.
무엇보다 지역사회 활동으로 쌍둥이 학비를 주면서 시작한 장학 사업은 지금도 2차례 40억 원을 쾌척해 운영할 정도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정치 이야기로는 "오랜 기간 백인들의 핍박과 폭력 속에 살았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정치 보복을 하지 않았다"는 코멘트가 인상적이다. 쌀 가게에서 배달청년에서 사업가로, 지역사회 활동가에서 정치인 중 재산신고 1위권에 오를 정도로 성장한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그가 이런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힘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이제 내가 더 잘할 차례'라는 독백을 남기고 글을 마감했다.
/정의종기자 je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