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실종되고 폭언과 몸싸움이 난무한 지난 4박 5일간의 국회는 말 그대로 의회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동물 국회'로의 퇴행을 경험했다.
자유한국당을 뺀 여야 4당은 30일 자정을 전후해 우여곡절 끝에 선거제·개혁법안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이뤄냈지만, 이를 육탄 저지하는 한국당과의 극한 대치로 국회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여야는 적어도 내년 4·15 총선까지 대화와 타협을 통한 성숙한 협치를 구현할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악수에 악수를 거듭했다는 평을 듣는다.
◇ 선진화법 무력화한 부끄러운 '폭력 국회'
여야 4당이 앞서 패스트트랙 지정의 D데이로 정한 25일 밤, 국회 곳곳은 '으쌰으쌰' 구호에 맞춰 몸싸움을 벌이는 여야 의원과 당직자들의 땀 냄새로 자욱했다.
여야가 부끄러운 국회 내 폭력 사태만은 막아보자며 2012년 5월 합심해 만든 국회선진화법의 권위가 7년 만에 깡그리 무너지는 현장이었다.
한국당은 패스트트랙 법안을 상정할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와 정치개혁특별위원회 회의장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민주당과 바른미래당 의원들의 접근을 몸으로 막았다.
국회법상 회의 방해죄가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중한 처벌을 규정했지만, 민주당의 '징역 5년' 구호에 한국당은 '헌법수호'로 응수했다.
이에 앞서 한국당은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의 회의 참석을 저지하려고 국회의원회관 의원실 문을 소파로 가로막고, 6시간 넘게 채 의원을 사실상 감금하기도 했다.
채 의원이 창문 틈새로 간신히 얼굴을 내밀어 "창문을 뜯어서라도 나가야 한다"고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은 여야 대치 속 웃지 못할 아수라장의 한 장면으로 기록됐다.
한국당은 여야 4당의 패스트트랙 법안 제출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국회 의안과를 이틀간 점거하기도 했다. 국회사무처 사무실 점거는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1986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으로 국회 경내에 경호권을 발동했으나, 한국당의 막무가내 패스트트랙 저지는 그칠 줄 몰랐다.
급기여 26일 새벽 의안과로 진입하려는 민주당과 이를 방어하려는 한국당 관계자들이 강하게 충돌하면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몸에 멍이 드는 등 부상자가 속출했다.
국회 관계자들이 쇠지렛대(속칭 '빠루')와 망치, 장도리를 이용해 의안과 문을 강제로 열다가 나무로 된 문이 크게 파손돼 너덜너덜해지는 일도 발생했다.
◇ 정치력 결여에 구심점도 부재…'강 대 강' 충돌만
지난 4박 5일 동안 여야 5당 원내대표는 한자리에 모여 타협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를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패스트트랙 '무조건' 강행과 '필사' 저지만이 충돌했다.
고비마다 '정치력'이 아쉬웠다.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는 사개특위에서 여야 4당의 패스트트랙 추진에 반대하는 오신환·권은희 의원을 배제하고 찬성파인 채이배·임재훈 의원을 대체 투입해 당사자들의 원성을 샀다.
통상 원내대표와 사보임(상임위 교체) 당사자가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한 후 원내대표가 국회의장에 사보임을 신청하던 관례를 무시한 것이다.
패스트트랙 법안 발의를 도맡은 민주당도 통상 의안과를 방문해 서류를 제출하던 관례에서 벗어나 25일 팩시밀리(팩스)로 법안을 발의하려다 이미 사무실을 점거한 한국당에 가로막혔다.
민주당은 이튿날 전자입법발의시스템 도입 14년 만에 처음으로 이 시스템을 이용해 법안을 발의, 한국당의 허를 찔렀으나, 이 같은 '묘수'를 찾기 전까지 의안과로 진입하기 위해 육탄전을 불사했다.
한편 지난 24일 한국당 의원들의 국회의장실 항의 방문에 충격을 받아 병원에 입원한 문 의장은 4박 5일 내내 국회를 비워 여야 협상의 '구심점'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다.
국회 수장이자 정치 선배로서 여야 원내대표를 수시로 불러 타이르고 다그치며 절충점을 찾도록 독려하던 의장의 치명적 부재는 지난 며칠 국회가 무법지대로 전락하는 한 배경이 됐다는 분석이다.
문 의장의 위중한 건강상태를 고려하더라도, 국회부의장이든 '이금회'의 중진이든 다른 누군가가 아무도 중재역을 시도하지 않은 점은 아쉬운 대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 무더기 고발에 감정 악화…내년 총선까지 여파 전망
패스트트랙 정국의 국회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밤샘 대치로 피로에 찌든 의원들과 당직자들은 정장 대신 점퍼로 갈아입고 소매를 걷어붙인 채 투사처럼 국회를 누볐다.
민주당과 한국당 지도부는 의원들에게 강제 동원령을 내렸다. 당번을 정해 주말에도 예외 없이 국회를 지키도록 지시, 만일의 충돌 사태에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가운데 양당 사이에선 고발이 난무했다.
민주당은 나경원 원내대표 등 한국당 의원 총 29명을 1·2차에 걸쳐 국회법상 회의 방해죄, 형법상 특수 공무집행방해 혐의 등으로 서울중앙지검에 무더기 고발했다. 정의당도 한국당 의원 40명을 별도 고발했다.
몸싸움에 앞장섰던 일부 보좌진도 피고발인에 포함됐다.
이에 한국당은 홍영표 원내대표 등 민주당 의원 17명과 정의당 여영국 의원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공동상해) 혐의로 맞고발했다.
날 선 고발전을 두고 민주당은 "유야무야 끝내지 않을 것"(홍영표 원내대표)이라며, 한국당은 "끝까지 고발당한 분 지키겠다"(황교안 대표)이라며 벼랑 끝 전략을 고수했다.
갈등이 격화하면서 평시라면 나오기 어려웠을 폭언도 쏟아졌다. 당분간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을 실어 서로를 공격했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도둑놈에게 국회를 맡길 수 있겠는가"라고 한국당을 질타했고,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제왕적 대통령에게 홍위병까지 선사할 공수처법"이라며 여야 4당 공조를 비난했다.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가 권은희 의원의 공수처 법안을 패스트트랙으로 함께 지정하는 조건으로 회의에 협조하겠다고 한 데 대해 바른미래당 내 반대파도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바른미래당 하태경 최고위원은 "김 원내대표가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는 정신 상태"라며 "민주당도 제 정신이 아니다. 국회가 비정상 상태"라고 맹비난했다.
지난 4박 5일, 무분별한 폭력과 기대 이하의 정치력, 선정적인 말싸움으로 요약되는 여야 충돌의 '상흔'은 1년가량 남은 내년 총선까지 국회 협치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