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낚시터로 '율도' 가장 유명세
'어조상월' 월미도, 경인지역 별천지 불려
1971년 서울사람들 인천앞바다 손맛 만끽
'제1회 선상낚시대회' 새로운 자랑거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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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오 인천본사 편집제작국장
인천은 낚시의 도시였다. 지금도 역시 그렇다.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서는 언제든지 낚시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바닷물이 깨끗하지 않아 낚은 물고기를 먹을 수나 있겠나 싶지만 그들은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라는 투다. 송도신도시 건너 신항이나 LNG기지 쪽 방파제에도 낚시꾼들이 끊이질 않는다. 낚시 금지구역이라고 써 붙인 팻말도 낚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물때가 좋은 날, 연안부두나 남항에서는 낚시꾼들을 가득 태운 배들이 새벽 출항을 한다. 서해5도의 갯바위 역시 낚시꾼들의 차지다. 낚시와 관련한 거의 모든 장소를 품고 있는 인천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주민들의 낚시터로 기능한 지 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낚시터로서의 인천의 영광은 일제강점기에 크게 빛이 났다. 향토사학자 이훈익 선생의 '인천지명고'는 율도를 소개하면서 '일제 때부터 가장 좋은 낚시터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했다. 월미도 건너 작약도의 동북쪽에 있던 율도는 1980년대 매립되어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인천 연안의 그 많은 섬들 중에 하필 율도가 낚시터로 제일 유명했는지는 별다른 설명이 없어 알기 어렵지만 물고기들이 많이 잡혔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아마도 갯바위 낚시였을 게다. 서울에서도 유명했던 행락지 월미도는 야간 낚시로 뭇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1950년대 후반 발간된 '경기사전'에는 월미도와 송도를 인천의 몇 안 되는 명승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월미도와 송도를 낚시 장소로 특별하다고 소개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 월미도는 6·25 전까지 해수욕장, 바닷물 풀장, 여관, 식당, 유희장, 별장(용궁장) 등이 완비되어 있었고, 특히 바다 위에 떠 있는 누각에서의 '어조상월(魚釣常月)'은 경인지역 일대에서는 별천지였다고 쓰고 있다. 어조상월, 낚시하면서 달을 구경한다는 얘기다. 바로 야간 낚시를 말한다. 연수구 옥련동 능허대 부근의 송도 역시 낚시터로 유명했던 듯하다. '해안에 돌출한 기암괴석으로 이룬 소산(小山)으로 노송이 울창하여 푸른 파도를 덮어 흰 백사장과 푸른 소나무가 볼 만한 곳이다. 만조(滿潮)엔 어조(魚釣), 간조(干潮)엔 습합(拾蛤)으로 각지에서 방문객이 늘 끊이질 않았다'고 송도를 소개해 놓았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해안 바다 위에서 낚시를 하고, 물이 빠지면 갯벌에 나가 조개를 주웠다는 거다.

1971년 8월, 서울 중구 태평로 2가 서울시청 앞 대한일보 사옥에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13층 사옥에 9층 길이였다. '제2회 국제바다낚시대회'를 알리는 거였다. 대회 장소는 어디였을까. 현수막에 장소까지는 적혀 있지 않았는데, 당연히 인천 앞바다였을 게 아닌가 싶다. 이때만 해도 인천의 바다낚시 열기는 대단했다. 인천 어디에서고 낚시가게가 활황을 이뤘다. 바다가 없는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인천 앞바다에 와서 바다를 즐기고는 했다. 앞에서 얘기한 월미도에서의 '어조상월'은 아마도 서울 사람들이 대부분 차지했을 듯하다. 바다 위에 세운 누각, 용궁장은 돈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던 명소였다. 당시 그 월미도는 서울 사람들이 꿈꾼 환락의 도시였다.

경인일보가 23일 제1회 선상 낚시대회를 열었다. 새벽 4시 30분, 수십 척의 낚싯배들이 대어 낚기의 기대를 품은 낚시꾼들을 태우고 중구 남항부두에서 출항해 2시간 거리의 풍도 해역까지 나아가서 낚시를 했다. 출항에서 낚시, 시상식에 이르는 하루 종일 낚시객들의 축제 한마당이었다. 바닷바람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서울 등 수도권 사람들이 낚시하면서 해양레포츠를 만끽하는 시간이었다. 바다와 레포츠가 결합된 선상 낚시, 인천의 새로운 자랑거리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진오 인천본사 편집제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