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억류됐다가 지난해 5월 풀려난 한국계 미국인 김동철(65) 목사가 미국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를 통해 강제노역과 고문 등 억류 당시의 뒷얘기를 전했다.

앞서 일부 다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미 정보당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이미 밝혔던 김 목사는 자신에게 도움을 줬던 북한 인사들이 처형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 목사는 1980년대 부친의 권유로 미국에 이민을 간 뒤 목사가 됐다.

2000년 선교를 위해 중국으로 거처를 옮긴 뒤 2002년에는 대북사업을 위해 북한 당국으로부터 나선지구 거주 허가를 받았다. 280만달러의 전 재산을 털어 현지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두만강 호텔을 열었다.

연간 호텔 수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40만달러를 북한 정부에 냈다.

김 목사는 북한에서 사업을 하며 한국과 중국을 방문했을 때 한미 정보기관이 자신에게 접근, 스파이 활동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는 정보기관으로부터 손목시계에 장착된 카메라와 도청 장치, 활동자금 등을 건네받았으며, 그들은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수집을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김 목사는 북한 내 자신의 정보원들에게 돈을 주고, 북한의 핵 과학자나 무기시설에서 종사하는 북한 관리들과의 접촉을 위해 군 엘리트들에 대한 접근을 지렛대로 삼았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북한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이 같은 정권이 지구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의아해지면서 더 혼란스럽고 궁금해졌다"면서 "북한에 대해 더 많이 알아내 정보기관과 공유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김 목사는 2015년 10월 북한 함경북도 나선에서 체포돼 약 31개월간 억류 생활을 했다. 북한은 그에게 간첩과 체제전복 혐의를 적용해 2016년 4월 노동교화형 10년을 선고했다.

그는 북한에서 체포된 후 자신에 협력했던 북한 인사 6명이 처형됐다면서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체포된 후 7개월간 나선과 평양의 안전가옥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는 북한 조사 요원들이 자신의 두 손을 뒤로 묶고 무릎을 꿇린 뒤 머리를 욕조 물속에 집어넣는 물고문을 했으며, 이 때문에 두차례나 기절했다고 주장했다.

김 목사는 노동교화형 10년을 선고받은 후 눈을 가린 채 평양 외곽의 강제노역소로 끌려갔다면서 '수인번호 429(번)'를 달고 1주일에 6일,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노역을 했다고 설명했다. 북측 관리 요원들이 겨울에는 언 땅을 파게 한 뒤 다시 묻게 했다고 말했다.

북측이 제공한 식사는 현미와 발효된 콩 수프, 세조각의 무 피클로 변함이 없었다면서 자신이 베리류나 식물 뿌리, 단백질 보충을 위해 심지어 유충을 먹기도 했다고 전했다.

김 목사는 여러 차례 극단적인 선택도 생각했다면서 8명의 북한 무장 경관들이 하루 24시간 교대로 자신을 밀착 감시해 그런 극단적 선탠을 할 "장소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손가락이 구부러지고 만성적인 허리 통증 등을 앓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첫 6·12 북미정상회담을 앞둔 지난해 5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 때 역시 한국계 미국인인 김상덕(미국명 토니 김), 김학송 씨 등과 함께 석방돼 폼페이오 장관과 같이 미국으로 귀환했다.

자신을 태운 비행기가 메릴랜드주의 앤드루 공군기지에 안착했을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기내에 올라 귀환을 환영했고, 김 목사는 자신이 석방될 때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한에 대해 "애증의 나라"라면서 "북한은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통제가 강력한 독재, 노예 시스템"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지난 6월 서울에서 자신의 억류 생활 등을 담은 '보더 라이더'(Border Rider)를 출간했으며, 영어와 일본어판도 낼 예정이다. /뉴욕=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