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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전 공포 '신문에 고스란히'1980년대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사건 발생 30여년만에 실체를 드러내면서 당시 범인의 끔찍한 살해수법이 재조명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1986년 10월 24일(2차사건, 첫 보도), 87년 1월 12일(5차사건), 87년 1월 15일(살인공포보도), 88년 9월 9일(7차사건), 90년 11월 17일(9차사건)자 경인일보 당시 보도지면. /경인일보DB

1986년 10·12월 이듬해 1월 발생 3건
1986년 10월 24일 사회면에 첫 기사
초동수사 부실 뚜렷한 증거 못찾아
警 방향 갈팡질팡 허위진술 강요도

잡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를 경찰이 30여 년 만에 특정했다. 1996년 6월 수사를 종료할 때까지 수사기간만 10여 년이 소요됐지만 결국 공소시효가 만료된 이제야 용의자를 찾았다.

경인일보는 첫 수사가 시작된 1986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가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의 진행과정과 뒷이야기를 풀었다. 또 당시 수사과정에서 나온 여러 단서와 수사진행상황을 현재의 수사와 비교하며 앞으로 풀어야 할 수사과제를 짚었다.

■ 단순 살인사건 취급, 부실 초동수사


"선 보러 집 나갔던 처녀, 수로에서 알몸 변시(變屍)로"

1986년 10월 24일 경인일보 사회면 한 구석에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2줄짜리 사건기사가 실렸다.

경찰도, 언론도 젊은 여성을 노린 단순 성범죄로 취급한 이 날의 사건(사건발생 추정시간 1986년 10월 20일)은 밝혀진 것만 10개 사건에 이르는 최악의 연쇄살인사건의 시작이었다.

이 사건이 단순 사건으로 취급되며 현장에서 제대로 된 증거물도 채집하지 못한 채 흘러가는 동안 같은 해 12월 14일에 20대 여성 피살사건이 발생했고 경찰은 2차와 동일한 수법임을 파악해 수사본부까지 차리지만, 뚜렷한 진척은 없었다.

다음해 1월 10일, 10대 여성이 지난 사건과 같은 수법으로 피살됐지만 수사는 '인근 불량배 소행'이라며 엉뚱하게 흘러갔다. 당시 경인일보 보도에는 '경찰은 이번 사건을 강간살인사건으로 보고 인근 불량배들을 중심으로 용의자를 찾고 있다'고 적혔다.

하지만 1월 사건 이후 경인일보는 해당 사건을 '화성 연쇄강간살인사건'으로 규정하고 연일 보도를 이어갔다.

반면 '범인은 독 안에 든 쥐'라고 장담하던 경찰의 수사는 유력 용의자를 추정하지도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

'갈팡질팡 경찰 원점 맴돌아, 화성 연쇄강간살인사건'의 1987년 1월 26일자 기사에는 "심지어 최근들어서는 범행수법, 장소, 대상 등으로 미루어 틀림없이 동일인에 의한 단독범행일 것이란 수사의 대전제도 흔들려 정남면에서 있었던 두번째 사건은 다른 범인에 의한 범행일 수도 있다는 새로운 가정을 세운 채 수사방향을 수정하는 등 근본에서부터 갈팡질팡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수사가 원점에서 맴도는 가장 큰 이유로 "똑같은 형태의 살인사건 3건이 발생하고 있으나 경찰이 사건현장에서 찾아낸 단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비판했다.

■ 용의자로 조사한 인물만 1천여 명, 과학적 입증 어려워 '헛발질'


1988년 9월 7일 50대 주부가 또 다시 같은 수법으로 피살됐다. 이 사건은 다행히 피살현장 부근에서 목격자의 제보로 용의자의 몽타주를 만들어 현상수배했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그동안 경찰은 1천444명을 용의자로 조사했지만 더듬기 수사만 반복한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1988년 10월 22일자에 '화성수사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통해 용의자를 떠올리는 방식이 원시적이라며 "강간살인을 저질러 경찰에 붙잡혔던 동일전과자를 우선 한차례씩 죄다 불러보거나 사건 당일행적을 묻는다. 행적이 입증되거나 최근 생활이 건전했다면 다음 사람을 확인한다"고 꼬집었다.

단서가 없으니 유사범죄자 위주로 용의자 지목 범위만 계속 확대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경찰이 증거도 없이 연행해 수사했던 이들의 피해도 이어졌다.

1990년 12월 25일자에는 '화성 수사 또 "강압" 회오리'라는 제목으로 경찰이 허위진술을 강요하고 가혹행위를 가해 수사받던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까지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모든 사건 정액 검출불구 기술 열악
1990년 여중생 피살건서 'B형' 판정
용의자 DNA 일치불구 'O형' 논란
"경우의 수 많아 혈액형으론 부정확"

■ 용의자 혈액형 지금도 '오락가락'


그간 모든 사건에서 정액이 검출됐지만 당시 수사기술은 혈액형조차 판정할 수 없었다.

그러다 1990년 11월 15일 태안읍에서 발생한 여중생 피살사건에서 단서를 찾는다.

피해자의 유류품에서 정액이 검출됐는데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혈액형' 추출에 성공한 것. 이 때 나온 혈액형이 'B형'이다. 또 때마침 당시 사건 인근에서 20대 여성을 성추행한 19살 윤모군을 체포했다.

더불어 윤군의 옷에서 발견한 혈흔을 검사했더니 여중생 피해자의 혈액형인 A형이 검출됐고 윤군의 자백까지 받아 사건이 급물살을 탔다.

하지만 강요에 의한 허위자백 논란이 일자,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현장서 채취한 정액과 윤군의 혈액을 일본수사기관에 보내 유전자감식을 의뢰했다. 그러나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결과를 얻어 결국 여중생 피살사건도 오리무중이 됐다.

30여년 만에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특정된 이모씨는 5, 7, 9차 사건의 증거물에 남아있던 DNA와 일치했다. 하지만 이씨는 사건 당시 경찰이 특정한 용의자의 혈액형과 다르다. 이 부분이 현재 논란이 일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DNA가 일치했다면 동일인일 확률이 99.999%"라며 "당시 수사기록을 보면 용의자가 B형이라고 단정해 수사한 것은 아니다. 증거품에서 다른 사람의 혈액형이 추출될 수 있는 등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어 혈액형으로 범인을 특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수사 당시 단서를 거의 잡지 못했던 다른 사건들도 초심으로 돌아가 재수사해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경찰은 "다른 사건의 현장 증거물도 감정 중"이라며 "현재 DNA 감식이 절반 정도 진행돼 아직 초기 단계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공지영·이원근·김동필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