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차·주택 등 '좋은 것' 정의하던 세태
이젠 필요한 것만 쓰는 것이 미덕인 시대
필카·연필등 불편하지만 손에 익은 것들
비우고 취하는 선택… 삶·가치관 달라져


이진호
이진호 인천본사 사회부장
지난해 클래식 기타 교습 자격증을 취득한 선배는 대학 동아리 시절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심지어 군 복무 때조차 오른손 손톱을 짧게 깎은 적이 없다고 했다. 손톱이 길어야 풍부한 기타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요즘은 나이 때문인지 손톱이 예전처럼 단단하지 않다며 손톱 강화제까지 바를 정도로 관리에 정성을 쏟는다. 선배에게 클래식 기타는 단순한 취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혹시나 은퇴 후 기타교습소를 차리게 된다면 오른손 손톱은 노후대책에 필요한 유용한 자산이 될 것이다. 살면서 마음에 두고 챙기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언제부턴가 막연하게 좋은 집, 고급 승용차, 최신형 가전제품이 삶에 있어 '좋은 것'이라고 여겨왔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작가가 한 언론사에 기고한 칼럼에서 "제발 '좋은 것'과 '비싼 것'을 혼동하지 말라"는 대목을 읽고 마음속으로 뜨끔한 적이 있다.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으니 비싼 것만 찾는다"고 일침을 가한다. 싫은 것, 나쁜 것, 불편한 것을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하나씩 제거해나가면 삶은 어느 순간 좋아진다고 했다.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도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집안의 생활용품이나 옷가지 등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캠핑 등 여가활동에서 필요한 장비나 용품을 최소화하면서 적지만, 더 좋은 것을 추구한다. 미니멀리즘의 선구자인 독일 출신의 유명한 산업디자이너 디터 람스(Dieter Rams)는 "미니멀리즘이란 무조건 줄이는 게 아니라 '나쁜 것'을 줄이는 것"이라고 했다.

한때는 물건을 정리해 수납을 잘하는 것이 살림을 잘하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쌓아두지 않고 필요한 것만 사용하는 '비움', '덜어냄'이 미덕인 시대가 되고 있다. 정리의 기본은 '버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수납을 잘할수록 물건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쌓아둔다고 풍요해지는 게 아닌데도 버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도 없다.

일본 최고의 정리 상담사로 불리는 곤도 마리에(近藤麻理惠)는 자신의 저서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했다. 낡은 찬장 속에 십수 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쌓여있는 예쁜 식기와 와인잔들은 그저 공간만 차지하는 짐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언젠가는 쓸지 몰라서, 의미 있는 선물이라며 버리기를 주저한다. 좋은 느낌을 받은 옷을 여러 벌 사놓고 즐거워하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것에 끌리면 전에 사뒀던 것들에 대한 애정은 쉽게 식는다. 마음에 드는 옷을 사면 한 달이 즐겁고, 좋은 차는 6개월, 좋은 집도 1년이 지나면 만족감이 줄어든다.

비우고, 취하는 선택은 각자의 삶과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각자에게 쓸모와 가치 있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구분된다. 생각해보니 손에 익은 만년필, 잘 다듬어 놓은 연필, 반들거리는 휘발유 라이터, 30년 넘게 들고 다니는 수동식 필름카메라가 그런 것이 아닐까. 주위에선 "귀찮게 그런 걸 아직도 쓰냐"고 한마디씩 한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귀찮은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다. 만년필은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고 잉크도 손에 묻곤 하니 불편하다. 이따금씩 기름을 넣어야 하는 라이터도 마찬가지다. 어렵게 구한 카메라 필름을 현상, 인화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1주일은 기다려야 한다. 어쩌겠는가. 아무리 편하다 한들 디지털카메라보다 몸에 익어버린 필름카메라에 마음과 손이 더 가니. 시간이 지나도 싫증 나지 않고 항상 마음이 닿아 있는 것들이 삶에 유용하고 좋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진호 인천본사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