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세계무역기구(WTO) 내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더는 주장하지 않기로 한 것은 미국이 WTO의 개혁을 끊임없이 압박하는 가운데 앞으로 있을지 모를 WTO 협상보다는 미국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가져가는 것이 국익에 더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이뤄졌다.
기존 WTO 협상을 통해 얻은 혜택은 그대로 유지하는 데다가 미국의 자동차 무역확장법 232조 조치 결정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개도국 지위를 고집할 경우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더 많다고 봤기 때문이다.
다만 국가 전체적으로는 WTO 개도국 지위를 가져가지 않는 것이 이득이 될지 몰라도 사실상 유일하게 개도국으로서의 특혜를 인정받아온 농업 부문을 앞으로 어떻게 보호하고 농민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가 숙제로 남았다.
◇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라…한국이 갈등 중심 서는 것 피해
WTO에서 개도국은 회원국이 스스로 판단해 개도국 여부를 밝히는 '자기선언' 방식을 따른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선진국이어도 해당 국가가 '우리는 개도국'이라고 주장하면 개도국이 되는 것이다.
WTO 협정·결정 내 개도국 우대 조항은 지난해 기준 155개이다. 두루뭉술하게 보면 개도국은 선진국보다 관세나 보조금을 덜 깎고, 관세 철폐 기간을 조금 더 길게 가져갈 수 있다.
한국은 자기선언을 통해 개도국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지만,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이후 농업과 기후변화 부문을 제외하고는 개도국으로서의 혜택을 받지 않고 있다.
그동안 미국 등 선진국은 WTO 개도국 지위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왔다.
경제적 발전도가 높은 일부 국가가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면서 선진국에 비해 유리한 조건을 가지는 것이 부당하다는 이유에서다.
만장일치로 결정되는 WTO 협상이 오랜 기간 교착 상태에 있는 것도 선진국과 개도국 간 갈등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본격적으로 이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월 26일(현지시간) WTO가 개도국 문제를 손봐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촉구하면서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WTO가 90일 내 실질적 진전을 이뤄내지 못하면 미국 차원에서 이들 국가에 대한 개도국 대우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개도국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4가지 기준으로는 ▲ OECD 가입국 ▲ 주요 20개국(G20) 회원국 ▲ 세계은행에서 분류한 고소득 국가 ▲ 세계 상품무역에서의 비중이 0.5% 이상을 제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것이지만, 4가지 기준에 모두 부합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해 오히려 한국이 더 큰 압박을 받는 상황이 됐다.
정부 한 관계자는 "만약 한국이 계속 개도국으로 남는다면 중국과 인도가 한국을 핑계로 댈 가능성이 크다"며 "이 경우 자칫 미국 대 중국의 싸움이 미국 대 한국의 싸움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이후 브라질,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UAE), 대만 등이 더는 WTO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기로 하면서 시선이 한국으로 쏠린 가운데 한국 역시 앞으로의 WTO 협상에서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정부는 25일 대외경제장관회의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현시점에서 개도국 특혜에 관한 결정을 미룬다고 하더라도 향후 WTO 협상에서 한국에 개도국 혜택을 인정해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결정이 늦어질수록 대외적 명분과 협상력 모두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크다"고 설명했다.
◇ 미국과의 사전 논의 이뤄져…자동차 232조 제외 무게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마감 시한은 지난 23일이었다.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이보다 이틀 뒤에 나왔으나 이미 미국과는 사전 논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주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해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면담하면서 WTO 개도국 문제를 이야기했다.
당시 만남에서 유 본부장은 미국이 WTO 개도국 문제에 대한 상당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개혁에서 필요한 사항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에 유 본부장은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계속 주장하지 않을 것을 알리는 동시에 농업 부문의 반발 등 우려되는 점도 있음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4일 귀국한 유 본부장은 인천국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 측은 현재와 미래 협상에서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더는 주장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며 "WTO 개도국 문제는 한국 농업의 민감성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번 결정으로 한국이 미국의 자동차 무역확장법 232조 적용 제외를 주장하는 데 더욱 힘을 얻게 됐다.
무역확장법 232조는 외국산 수입 제품이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되면 긴급하게 수입을 제한하거나 고율의 관세를 매길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지난 2월 트럼프 대통령에게 수입산 차량 및 부품이 미국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보고서를 제출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토대로 보고서 검토 기간이 종료되는 5월 18일까지 최종 결정을 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마감 시한 전날인 5월 17일 백악관을 통해 발표한 포고문에서 유럽연합(EU)과 일본, 그 외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되는 자동차 및 부품에 대한 관세부과 결정을 180일 연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차례 유예된 조치 결정 시한은 다음 달 13일이다.
이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의 영향으로 한국은 자동차 232조 조치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지만, WTO 개도국 관련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이 같은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유 본부장은 미국 방문에서 한국을 자동차 232조 조치에서 제외해달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WTO 개도국 문제는 미래 협상에 관한 것이어서 기존 협상에서 받은 혜택은 그대로 유지된다.
중국, 인도 등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언제 WTO 협상이 열릴지도 미지수라 이번 결정이 당장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또 정부는 농업의 민감 분야는 최대한 보호할 수 있게 '유연성을 협상할 권리'를 보유·행사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았다.
하지만 농민들의 반발이 큰 상황에서 이를 어떻게 설득하고 농업 부문 보호 대책을 보완해나갈지는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정부 관계자는 "항상 눈과 귀를 열고 농민들의 이야기를 들어 나갈 것이며 필요한 역할을 책임지고 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기존 WTO 협상을 통해 얻은 혜택은 그대로 유지하는 데다가 미국의 자동차 무역확장법 232조 조치 결정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개도국 지위를 고집할 경우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더 많다고 봤기 때문이다.
다만 국가 전체적으로는 WTO 개도국 지위를 가져가지 않는 것이 이득이 될지 몰라도 사실상 유일하게 개도국으로서의 특혜를 인정받아온 농업 부문을 앞으로 어떻게 보호하고 농민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가 숙제로 남았다.
◇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라…한국이 갈등 중심 서는 것 피해
WTO에서 개도국은 회원국이 스스로 판단해 개도국 여부를 밝히는 '자기선언' 방식을 따른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선진국이어도 해당 국가가 '우리는 개도국'이라고 주장하면 개도국이 되는 것이다.
WTO 협정·결정 내 개도국 우대 조항은 지난해 기준 155개이다. 두루뭉술하게 보면 개도국은 선진국보다 관세나 보조금을 덜 깎고, 관세 철폐 기간을 조금 더 길게 가져갈 수 있다.
한국은 자기선언을 통해 개도국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지만,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이후 농업과 기후변화 부문을 제외하고는 개도국으로서의 혜택을 받지 않고 있다.
그동안 미국 등 선진국은 WTO 개도국 지위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왔다.
경제적 발전도가 높은 일부 국가가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면서 선진국에 비해 유리한 조건을 가지는 것이 부당하다는 이유에서다.
만장일치로 결정되는 WTO 협상이 오랜 기간 교착 상태에 있는 것도 선진국과 개도국 간 갈등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본격적으로 이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월 26일(현지시간) WTO가 개도국 문제를 손봐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촉구하면서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WTO가 90일 내 실질적 진전을 이뤄내지 못하면 미국 차원에서 이들 국가에 대한 개도국 대우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개도국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4가지 기준으로는 ▲ OECD 가입국 ▲ 주요 20개국(G20) 회원국 ▲ 세계은행에서 분류한 고소득 국가 ▲ 세계 상품무역에서의 비중이 0.5% 이상을 제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것이지만, 4가지 기준에 모두 부합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해 오히려 한국이 더 큰 압박을 받는 상황이 됐다.
정부 한 관계자는 "만약 한국이 계속 개도국으로 남는다면 중국과 인도가 한국을 핑계로 댈 가능성이 크다"며 "이 경우 자칫 미국 대 중국의 싸움이 미국 대 한국의 싸움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이후 브라질,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UAE), 대만 등이 더는 WTO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기로 하면서 시선이 한국으로 쏠린 가운데 한국 역시 앞으로의 WTO 협상에서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정부는 25일 대외경제장관회의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현시점에서 개도국 특혜에 관한 결정을 미룬다고 하더라도 향후 WTO 협상에서 한국에 개도국 혜택을 인정해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결정이 늦어질수록 대외적 명분과 협상력 모두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크다"고 설명했다.
◇ 미국과의 사전 논의 이뤄져…자동차 232조 제외 무게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마감 시한은 지난 23일이었다.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이보다 이틀 뒤에 나왔으나 이미 미국과는 사전 논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주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해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면담하면서 WTO 개도국 문제를 이야기했다.
당시 만남에서 유 본부장은 미국이 WTO 개도국 문제에 대한 상당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개혁에서 필요한 사항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에 유 본부장은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계속 주장하지 않을 것을 알리는 동시에 농업 부문의 반발 등 우려되는 점도 있음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4일 귀국한 유 본부장은 인천국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 측은 현재와 미래 협상에서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더는 주장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며 "WTO 개도국 문제는 한국 농업의 민감성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번 결정으로 한국이 미국의 자동차 무역확장법 232조 적용 제외를 주장하는 데 더욱 힘을 얻게 됐다.
무역확장법 232조는 외국산 수입 제품이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되면 긴급하게 수입을 제한하거나 고율의 관세를 매길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지난 2월 트럼프 대통령에게 수입산 차량 및 부품이 미국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보고서를 제출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토대로 보고서 검토 기간이 종료되는 5월 18일까지 최종 결정을 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마감 시한 전날인 5월 17일 백악관을 통해 발표한 포고문에서 유럽연합(EU)과 일본, 그 외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되는 자동차 및 부품에 대한 관세부과 결정을 180일 연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차례 유예된 조치 결정 시한은 다음 달 13일이다.
이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의 영향으로 한국은 자동차 232조 조치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지만, WTO 개도국 관련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이 같은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유 본부장은 미국 방문에서 한국을 자동차 232조 조치에서 제외해달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WTO 개도국 문제는 미래 협상에 관한 것이어서 기존 협상에서 받은 혜택은 그대로 유지된다.
중국, 인도 등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언제 WTO 협상이 열릴지도 미지수라 이번 결정이 당장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또 정부는 농업의 민감 분야는 최대한 보호할 수 있게 '유연성을 협상할 권리'를 보유·행사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았다.
하지만 농민들의 반발이 큰 상황에서 이를 어떻게 설득하고 농업 부문 보호 대책을 보완해나갈지는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정부 관계자는 "항상 눈과 귀를 열고 농민들의 이야기를 들어 나갈 것이며 필요한 역할을 책임지고 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