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 생이별… 생전모습 기억 못해
4남매 끔찍이 여겨 매일 품에 안아
제사 지내다 1990년대초 생존 확인
남북 이산 70년 세월, 아버지의 유작으로 상봉의 꿈을 이뤘다고 말한 황명숙(73)씨는 "저승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을 잡고 내려와 전시회를 보실 것 같다"면서 울먹였다.
지난 10일 인천문화예술회관에서 개막한 월북 작가 화봉(華峯) 황영준(黃榮俊, 1919~2002) 선생의 전시회를 찾아온 막내딸 황명숙씨는 경인일보와의 인터뷰 내내 '아버지'란 단어를 수십 번 되뇌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아버지와 생이별해야 했던 명숙씨의 당시 나이는 세 살. 생전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황씨는 '아버지'란 단어는 내게 있어 '그리움'이란 말과 똑같은 의미라고 했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지난 2007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입을 통해서일 뿐이다.
황영준 선생의 자식 사랑은 남달랐다고 한다. 아들과 딸 4남매를 끔찍이 여겨 매일 품에 끼고 살았을 만큼 그의 자식 사랑은 애틋했다.
황명숙씨는 "아버지는 집에 오시면 저를 비롯해 4남매를 품에 안고서 요놈은 커서 미술가 시키고 이놈은 크면 음악가 시키면 되겠어라고 말하며 어머니와 자식 얘기를 그렇게 많이 했다"며 "아버지의 자식 사랑이 컸던 것 같다"고 했다.
현재 4남매 중 황명숙씨의 큰오빠와 작은 오빠는 베트남전 참전 후 고엽제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언니만 대전에 살고 있다고 한다.
황영준 선생은 1950년 월북 후 2002년 사망할 때까지 북에서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양아들네가 그의 유일한 북한 내 가족이다.
황영준 선생의 그림 중에는 남한에 남겨둔 가족을 그리워하며 그린 작품이 여럿 있다. 황명숙씨는 "어머니도 아버지와 생이별한 뒤 남한에서 결혼하지 않았다"며 "오빠가 캐나다로 이민 가며 초청 형식으로 어머니도 모셔갔다"고 말했다.
황씨는 "아버지가 북한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1990년대 초반에야 알게 됐다"며 "이전까지는 생사를 확인하지 못해 매년 제사까지 모셨다"고 했다.
1988년 월북 작가에 대한 일부 해금 조치가 단행된 후 아버지 작품 몇 점이 우리나라에 소개됐고 수소문 끝에 북한에 아버지가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황씨는 설명했다.
황명숙씨는 "2002년 아버지와의 4차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이 확정된 후 몇 날 며칠을 설레서 잠도 자지 못했다"며 "그런데 이산가족 상봉 명단에 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방송 뉴스로 보고 정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황씨는 "이제 나도 나이를 먹고 손자들도 커 가면서 점점 아버지가 내 마음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작품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벅찼다"며 "아버지가 여기(전시회장)에 살아 계신 느낌"이라고 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