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엔 화구 들고 전국으로 따라다녀
퇴각 북한군이 '철도유물' 가져간 탓
박물관 직원으로 책임감에 넘어간듯
'이념단체 활동' 관련도 사실과 달라
북한 최고의 조선화가로 평가되는 황영준 선생의 막냇동생(90)이 30일 인천을 찾아 그동안 굳게 닫았던 입을 열고 북한으로 넘어가지 직전까지의 황영준 선생 일대기를 풀어냈다.
그동안 잘못 알려진 선생의 출생지 등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이 많다는 숙제를 남북한 미술학계와 관련 종사자들에 던져줬다.
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선생은 1919년 5월 20일 충남 논산군 연산면 덕암리에서 충북 옥천군 출신의 황경선과 논산 출신 안병직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황영준 선생은 옥천군 매화리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2002년 3월 5일 황영준 선생이 숨지기 전 유언을 받아적은 수양아들의 잘못된 기록에 따른 것이다.
황영준 선생의 동생은 "아버지가 형을 외갓집에서 낳았다고 부모님께 전해들었다"며 "친가가 옥천이고 학교까지 졸업해 당연히 형의 출생지도 옥천이라 여긴 것 같다"고 했다.
북한에서 펴낸 '조선력대미술가편람(증보판·1999)'에는 충남 룡산군 계룡산에서 태어나 옥천군 보통학교를 다녔다고 나와 있으나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계룡산 부근이 맞기는 하나 논산 연산면 덕암리에 걸쳐진 계룡산 자락이라는 거다.
황영준 선생의 부친은 옥천군 옥천읍 매화리 구덕재에 집을 짓고 자식들을 키웠다. 선생은 지금의 죽향초등학교를 22회로 졸업했다고 한다. 죽향초는 1909년 세워진 학교로 학교 홈페이지 연혁을 보면 황영준 선생이 다니던 시기에는 창명보통학교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931년 서울로 홀로 상경해 알려진 것처럼 이당 김은호 선생 아래서 그림을 배웠다.
황영준 선생의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간 것은 1942년이라고 기억했다. 이때부터 막냇동생은 학교를 다니며 주말이면 형의 화구를 들고 전국으로 다녔다.
먹을 갈아주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고 한다. 형이 서울지방철도국에 근무할 때는 직원에 나오는 공짜 열차표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황영준 선생의 동생은 "공휴일이면 내 손을 잡고, 사과가 많이 나는 영천에도 가고 전국을 다녔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분단의 비극은 그의 가족에게도 덮쳤다. 황영준 선생은 가족들을 옥천으로 보내고 일주일 뒤에 오겠다고 했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미술계에서는 그를 월북작가로 분류하고 있지만, 동생은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
미술에 남다른 재주가 있던 선생은 용산에 있던 철도박물관에 근무했었다고 한다.
9·28 서울수복 이후 퇴각하는 북한군이 철도 유물을 북으로 가져갔는데 황영준 선생은 자신이 아니면 이 유물을 지킬 사람이 없다고 판단하고 유물과 함께 북한으로 넘어갔던 것이라는 해석이다. 월북이 이념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한편 황영준 선생의 동생은 형이 해방 이후 인천교도소에 구속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당시 예술인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가 잡혀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1947년판 예술연감의 미술단체 인명록에는 황영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아 그가 좌익·우익단체에 거의 가담하지 않았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이 역시 후속 연구가 요구된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