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등 재난속 굶주린이웃 함께한 용기
우리사회 팬데믹 극복 국민적 몸부림 치열
자신만의 재능·지혜 공유로 나눔 실천할때
감염병이나 굶주림으로 인한 재난 상황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럴 때의 행동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판가름이 난다. 나만을 위하느냐, 남을 돌아보느냐. 올해 초에 번역되어 나온 윤이후(1636~1699)의 '지암일기'는 300년 이상의 세월을 뛰어넘어 코로나19 사태를 겪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지암 윤이후는 '어부사시사'로 잘 알려진 고산 윤선도의 손자이자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공재 윤두서의 생부다. 54세에 과거(증광시)에 급제해 때늦은 벼슬길에 나섰으나 함평 현감에 재직 중 돌연 그만두고 낙향했다. '지암일기'는 그가 함평 현감으로 있던 1692년 1월1일부터 세상을 떠나기 5일 전인 1699년 9월9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걸 묶은 것이다. 이때는 흉년, 전염병 같은 혹독한 재난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적 떼도 들끓었다. 죽어 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 일기는 먼 시간을 가로질러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이 안내한다.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재난 일기이기도 하다.
넉넉한 형편의 윤이후는 동네의 어려운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생활이 극히 곤란한 동네 사람들을 찾아 노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벼를 2말씩 지급하기도 했다. 노비와 같은 최하층민의 곤궁한 처지까지도 돌볼 줄 안 윤이후의 마음 씀씀이에 고개가 숙여진다. 윤이후는 인천에 살던 누이도, 그 누이의 셋째 딸도 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보내야 했다. 전염병이었던 듯하다. 인천에 사는 누이 가족의 생활 형편도 아주 어려웠다.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장례를 치르지 못할 정도였다. 전국의 거리마다 굶어 죽고, 돌림병에 죽고, 얼어 죽은 이들이 즐비했다. 인천의 누이처럼 출가한 가족의 살림살이도 힘겨웠지만 윤이후는 자기 마을의 가난한 이들을 저버리지 않았다. 가난은 나라도 어쩌지 못한다고 하는데, 윤이후는 최소한 자기 동네의 굶주림만은 혼자서 막아서고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를 이겨내기 위한 전 국민적 몸부림이 처절하다. 운동선수는 집안에서 운동하는 법을 공개하고, 예술인들은 자신의 특기로 코로나19에 주눅든 사람들을 달래고 있다. 다들 어려워하고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입장에서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내가 누리는 경제적 여유를 조금 덜어내도 괜찮고, 가진 재능을 나눠 주어도 좋다. 코로나19 이후가 보이지 않는다고 야단인데, 그 캄캄한 미래를 헤쳐나갈 지혜를 공유해도 된다. 나는 지금 코로나19 사태에서 무슨 일을 했다고 일기에 적을 것인가.
/정진오 인천본사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