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균 0.01도씩 지구 온도 상승 대표사례
자연·인간 질병도 알아차렸을땐 이미 늦어
우리사회에도 특정집단 악용 징후 큰 위협

변화가 매우 느리게 진행되면서 과거의 풍경이 지금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깨닫지 못하는 현상을 '풍경 기억 상실(landscape amnesia)'이라고 한다. 불규칙한 변동으로 인해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변화가 잘 드러나지 않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데 정치학에서는 '잠행성 정상 상태(creeping normalcy)'라고 부른다.
'총·균·쇠'로 잘 알려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앞서 출간한 '문명의 붕괴'에서 "경제, 교육, 교통 체증 등 어떤 문제가 매우 천천히 악화되고 있을 경우 한 해의 평균 수준이 그 전해에 비해 아주 약간 낮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기 힘들며, 따라서 미세하지만 한 사람이 정상(normalcy)이라고 생각하는 기준도 매년 조금씩 변동하게 된다"고 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이와 같은 변화는 사람들이 깨닫는 순간까지 수십 년간 계속 진행돼 어느 순간 몇십 년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태였으며, 현재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태가 사실은 악화된 상태임을 알게 되고는 갑자기 놀라게 된다"고 했다.
매년 평균적으로 약 0.01℃씩 지구 온도가 상승해왔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확인하고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도 대표적인 '풍경 기억 상실' 사례다. 문제가 제기된 이후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지구 온도 상승이 일정하게 올라가는 것이냐, 일시적인 현상이냐' 등을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지구 온도 변화가 해마다 불규칙한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기 때문에 미세한 차이가 누적돼 큰 차이를 보이기까지 단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질병도 이와 비슷하다. 암, 당뇨, 뇌·심혈관 질환 등 거의 모든 질병은 아주 서서히 진행된다. 잘못된 식습관이나 주변 환경, 스트레스 등이 신체에 충격을 주고 있지만, 워낙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일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특정 질병으로 진단을 받을 때는 이미 상당기간 체내에서 보이지 않게 진행돼온 결과다. 바닷물이 밀려오면 신발과 옷이 젖을까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하다 조금씩 옷이 젖으면 어느새 바닷물에 반쯤 잠겨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홀딱 젖어 난감한 상황에 처한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한여름 분수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도 처음에는 조심하는 듯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열이면 여덟아홉은 홀딱 젖고 정신 없이 논다.
'풍경 기억 상실'은 주로 잘못된 일이 오랜 시간 조금씩 반복되는데 알아차리지 못하고 결국 큰 피해를 보게 된다는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이 현상은 자연이나 인간의 질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 사회에서도 헌법적 가치를 무력화하고, 불건전한 사상이나 이념을 주입하기 위해 '풍경 기억 상실' 현상을 이용하려는 징후들이 보인다. 특정 집단이 추구하는 이념과 사상을 조금씩 흘려보내는 식이다. 반대 여론이 거세지면 잠시 주춤했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고개를 들며 조금씩 수위를 높인다. 시간이 흘러 여론이 둔감해지면 마치 정당한 주장처럼 떠들어 댄다. 비판적 사고를 없애고 자신들의 이념과 정책을 관철하려는 교묘한 술책이다. 특히 교육과 안보 분야에 이런 현상이 나타날 때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멍이 들어서야 맞은 것을 아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이진호 인천본사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