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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갈무리

멕시코 제3의 도시 몬테레이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던 30대 남성이 지난해 1월 숨졌다. 한국에 돌아온 그의 시신에는 뇌와 일부 장기가 없었다.

멕시코 당국은 외상이 없는 2차 뇌동맥 파열에 따른 자연사라는 부검 결과를 내놨다.

유족들은 부검 결과를 인정할 수 없었다. 재부검 요청을 하고 시신을 한국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냈다.

A(34) 사범은 지난 2016년 5월부터 멕시코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했다. 숨지기 전 슬하에 3세 아들과 11개월 딸을 뒀다.

사건은 지난해 1월2일 발생했다. 이날 오후 10시30분(현지시각) 몬테레이시의 한국인 운영 술집에서 한 회사 멕시코 주재원으로 나온 선배 B(40·구속기소)씨와 현지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지인 C(40)씨와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B씨와 C씨는 만취한 A 사범이 술집 주인, 직원들과 서비스 문제로 다투자 말렸다. B씨는 주점 방 안에서 A 사범을 몸으로 막아섰는데도 선배인 자신을 밀치고 주점 사람들을 폭행하려고 하자 오른손으로 A 사범의 왼뺨을 때렸다.

B씨는 신장이 165㎝, A 사범은 오랫동안 태권도를 수련한 178.5㎝의 건장한 30대였다. 말릴 재간이 없었다. B씨를 무시하고 술집 점주를 밀치고 폭행하자 A 사범은 목을 조르며 실랑이를 했다.

이 과정에서 B씨가 A 사범에게 떠밀려 넘어졌다. 벌떡 일어난 B씨는 재차 A 사범의 뺨을 때렸다. 이때 A 사범의 머리가 벽에 부딪혔다. 옆에 있던 C씨는 주점 출입문 앞 복도에서 양팔로 A 사범의 등을 세게 밀쳐 복도 벽면에 부딪히게 했다.

검찰은 B씨를 폭행치사 혐의, C씨를 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이 사건 재판을 맡은 수원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김미경)는 지난 15일 B씨의 죄명을 폭행으로 인정하고 징역 7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던 A씨는 출소했다. C씨는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다.

B씨의 변호인은 "멕시코에서 한 피해자에 대한 사망 직후 1차 부검에서 사인은 비외상성 지주막하출혈이었다"며 "설령 피해자의 사인을 외상성 지주막하출혈로 보더라도 어떤 폭행에 의해 피해자가 사망했는지를 분명히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없으므로 B씨의 폭행으로 피해자가 숨졌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B씨의 혈중 알콜 농도가 0.2733%로 만취 상태였다면서 B씨가 피해자의 사망을 예견할 수 없었던 사정도 있다고 변호인은 부연했다.

한국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행한 A 사범의 사망 원인은 외상성 뇌바닥면 지주막하출혈이었다. 다만 이 출혈은 머리 부위 또는 목 부위에 가해지는 비교적 경미한 외력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전제했다.

검찰은 국과수 부검 결과를 토대로 사건 당일 B씨가 A 사범을 수회에 걸쳐 폭행한 행위가 A 사범의 사망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B씨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선고형을 결정하며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멕시코 법의학연구소에서 이뤄진 부검으로 피해자의 시신에 인위적인 변형이 가해진 뒤 국과수 2차 부검이 이뤄진 점은 매우 아쉬웠다. 먼저 A 사범의 시신이 한국에 도착한 뒤 여러 조각으로 절단된 상태의 뇌, 심장 등 장기가 사망 이후 2주 넘게 지난 뒤에야 국과수에 도착했다.

재판 과정에서 멕시코 법의학연구소는 2차 부검을 시행한 국과수의 1차 부검에 대한 문제 제기와 재검토 요청에도 결론을 변경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재판부는 A 사범의 사망 원인을 외상성 뇌바닥면 지주막하출혈로 보더라도 피고인 B씨의 폭행과 인과 관계가 없거나 사망의 결과에 대한 예견가능성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폭행치사죄는 결과적 가중범으로 폭행과 사망의 결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지 않으면 사망의 결과에 대한 예견가능성, 즉 과실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예견가능성 유무는 폭행의 정도와 피해자의 대응상태 등 구체적 상황을 살펴 엄격하게 가려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90도1596, 2010도2680)도 있다.

대법 판례를 전제로 재판부는 "B씨가 A 사범을 폭행한 행위가 통상적으로 사람에게 사망의 결과를 초래할 정도로 중하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 부분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해 무죄를 선고해야 하나 공소사실에 포함돼있는 폭행죄를 유죄로 인정한 이상 따로 무죄를 선고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이어 B씨에 대한 선고형을 결정하며 "피해자 유족이 피고인의 엄벌을 원하고 있고, B씨가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고 볼 만한 사정이 없다. 피해자가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것을 말리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 사건 범행 경위"라고 덧붙였다.

앞서 숨진 A 사범의 부인은 사건 발생 20여일 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멕시코에서 억울하게 죽은 저의 남편을 도와주세요'라는 제목으로 청원 글을 게시했다.

A 사범의 부인은 이 글에 "남편이 쓰러진 뒤 의식이 없어 인근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사건 발생 지점과 3.9㎞ 떨어져 5분이면 가는 병원을 거리에서 허비하다 20~25분 걸려 도착했다"며 "동석했던 지인들은 대리기사를 불러 남편을 뒷자리에 태워 둘만 보냈고, 이동하던 도중 남편이 차에서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도착했는데, 출혈양이 많아 이튿날 0시35분께 숨을 거뒀다"는 내용을 담았다.

또 "한국에서는 처벌이 가능하다는데, 멕시코에서는 당시 동석했던 지인들의 과실치사를 물었으나 부검 결과가 자연사이기 때문에 처벌도 없다고 했다"며 억울한 심경을 담았다. 이 청원은 2만2천460명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 사건 재판은 지난 20일 검찰의 항소로 수원고법에서 재차 열린다.

/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