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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활동한 고 유정수씨의 아들 유창희씨가 아버지의 증언을 토대로 일기장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일기장 앞에 놓인 사진 속 인물은 전장속 일기를 작성한 고 유정수씨.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수원운동장·인천 축현초교등 집결… 장호원 거쳐 경상도 교육대 진입
4홉의 식량 배식·횡령 여파 짐작 대목등 '고난·궁핍' 흔적 고스란히
1951년 3월 "고향산천 가까우니 모두 얼굴에 희색"으로 일기 끝맺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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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 고 유정수씨의 일기에는 고난과 궁핍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 속에서도 놓치지 않았던 건 가족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1950년 12월 23일 첫 일기는 "오늘 8시까지 집합이라고 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는 "수원시 공설운동장에 가서 집합하였다. 궹장이 많은 사람의 물결 아마 만여명은 데리라"고 징집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같은 날 일기에서 그는 "고생은 이제부터다 지금부터 출발해서 목적지는 김량장(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이라고 한다. 길은 유리쪼각으로 포장한것 같이 어름으로 깔리고 갈래를 지나서부터는 가 일층 심하다"고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먼 길을 나서는 모습을 표현했다.

국민방위군은 서울(창덕궁), 경기북부(안산초등학교·아현초등학교), 경기남부(수원운동장), 인천(축현초등학교·동산중학교) 등에 집결했다. 인천에서 출발한 대오는 해군함정을 타거나 육로로 이동했고, 나머지 수도권 장정들은 대개 장호원-문경-영천을 거쳐 경상도로 진입했다.

수원을 출발한 유씨 일행 역시 용인, 장호원, 문경, 상주, 의성, 영천, 청도로 이동한다.

그의 일기 곳곳에서 혹한 속 이동의 어려움을 묘사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23일 김량장에 와서 추워 떠를때 연대장이 훈개하여 가로대 지난밤 여기서 동사자가 3명 났으니 너이들도 정신차리라는 것이였다"(50년 12월 25일 일기)는 대목이나 "이화령(충청북도 괴산군과 경상북도 문경시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 넘어 문경착, 죽을 고생을 한 기억이야 생사 잊지 못할터" 같은 구절이 그렇다.

12월 23일 출발한 그는 해를 넘겨 1월 4일 청도에 도착했다.

추위와 함께 유씨를 괴롭힌 건, 배고픔이었다.

"군위남방 2k 지점에서 유숙. 밥이 적어"(51년 1월 1일), "식사는 백미1일4합(홉)반이다 찬은 간장 된장과 된장국을 끓여주는대 때에 따라서는 이상 세가지중 한가지 밖에 없고 국만을 밥에 부어줄때가 많다"(51년 1월 7일)고 그는 썼다.

일기에 따르면 이들에겐 하루에 4홉의 식량이 배식됐다. 10홉은 1되와 같은데, 1되는 곡물을 두 손으로 움켜 잡았을 때 잡히는 정도의 양을 뜻한다. 당시 전쟁포로에겐 국민방위군보다 더 많은 1일 5홉5작(홉보다 작은 단위)의 식량이 주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교육대에 도착한 뒤로도 추위와 배고픔은 이어진다.

청도에서의 교육대 생활을 기록한 일기에서는 그 동안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국민방위군 횡령 사건의 여파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등장한다. 군 간부들은 국민방위군 몫으로 편성된 예산은 물론이고 식량도 중간에서 빼돌렸고, 이는 곧 국민방위군 민초들의 고통으로 되돌아왔다.

"내무실이 추어서 병자가 속출하는대 의무실에 설비도 약도 부족하여 곤란이다. 내무실 통교실 마루 바닥에 지직, 집, 가마니 등을 두서너겹 깔었으므로, 잘적에는 침구라야 담요 1매뿐인지라 모두들 춥다고 떠든다"(51년 1월 11일)거나 "이 고장에 거처한 이래 처음 겨끄는 모진 추이다 실내에 102명이 한 대끼여 자건만 찬바람이 얼골을 스처, 방안은 싸늘한 기운이 스쳐든다. 밤새도록 기침하느라고 혼이났다"(51년 1월 13일)는 데서 열악함을 가늠할 수 있다.

또 "훈련에 자신이 없는 내가 건강에도 자신이 없다. 기침이 어떻거면 가라앉일까? 이리궁리 저리궁리 하다가 별 도리없어 고만이다 의무실이 엉터리인 가닭이다"(51년 1월 14일)라고 썼다.

식량 부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주먹밥에 소곰도 없다"(51년 1월 29일)는 지경에 이르더니 "식사는 오날부터 일식에 1합(홉)1작으로 주러 붙고, 국도 없어 어느때는 메르치 여나문마리, 또는 된장 한숫가락 때로는 고등어나 갈치 조기 같은 것을 오, 육인 앞에 짜게 쩌서 한 토막식 준다. 국을 끓여 준대야 맨 된장 국이라 간을 않처서 맹물 같은대 그나마 반사발 밖에 않준다"(51년 2월 19일)는 수준에 달했다.

이런 모진 역경을 견디게 해 준 건 결국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이었다. 그는 51년 1월 17일 일기에서 "어잿 밤에는 잊어지지 않는 꿈을 꾸었다. 즉 다음과 같다 집에 도라갓는데 윤수(유씨의 부인)가 밥을 갓다주어서 맛있게 먹었다 잘때에 건넛방에 할머님이 생존자와 같으신 모습으로 누어 기시고 희수랑 이삼인이 같이 누어있었다. 나의 아들이라고 하는 어린아이가 재롱을 떠는대 내가 안어주면 좋와한다"고 기록했다.

"지반식구는 어찌 지내고 잇나? 자나깨나 생각이다 숙부께서는 어떻게 되신 것일까. 윤수야 잘지내느냐 넘어 나의 염려하다가 병이나 나지 않았는지 굳세게 이 세상을 사러다오-"(51년 2월 25일)라고 쓰기도 했다.

춥고 배고픈 고난도 희망을 꺾지 못했다. "누구나 머릿속에 훤히 띠이는 것은 그 풍성진 음식과 삿듯한 의복이다. 그리고 세배 단이는 이곳사람을 보면 고향 동리에서 흥성맛고 즐거웁고 재미나던 동리의 설날 광경이 눈에 환-하게 보이는 듯하다"(51년 2월 6일)던 그는 51년 3월에 이르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길에 "이제 고향산천이 보일 듯이 가까우니 모두들 얼굴에 희색을 띄우고 집에가서 가족 만나보고 음식해먹을 이야기로 발아픈 것은 잊는다"고 일기를 맺었다.

/김태성·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