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위군 고 유정수씨 유품, 일기장, 신분증 등251111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징집에 응해 전장에서 일기를 기록한 故 유정수씨가 남긴 당시 신분증 등 유품.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1950년 12월~ 1951년 3월까지 여정속 당시 식생활등 짐작 가능
'포성 은은히 들리며 속리산 공비잔적 소탕'… 잔혹한 현실 마주
'다찌노미 할때 고치장의 맛'… 남아있던 일본문화의 흔적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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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 고 유정수씨가 남긴 일기 속에는 1950년대 당시의 식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은 물론 한국전쟁의 참혹함과 교육대 생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일기에 나타난 한국전쟁은

-1950년 12월부터 1951년 3월까지 작성된 유씨의 일기는 수원에서 청도 교육대로 이동하고, 다시 귀향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예비부대 성격을 지녔던 국민방위군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실제 전투에 참여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지만, 이동과정과 교육대 생활 속에서 한국전쟁의 단편을 표현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51년 1월 경상북도 청도의 교육대에 도착한 뒤 작성한 일기에는 "교관왈 '전황은 현재 중공적이 부산근처까지 왔으리라고 추측된다 하며 화성군 피난민은 대전, 전주, 대구 등지에 집결되어 있다고' 모두들 집 식구가 어찌 되었을까 하고 잠도 자지 못하며 근심들 한다"(51년 1월 12일)는 내용이 나온다.

1950년 11월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서울이 다시 북한군에 넘어가는 1·4후퇴를 계기로 전선이 밀리고 만다. 이런 상황이 일기에 표현된 것이다. 귀향 여정이 담긴 51년 3월 일기 속에는 남겨진 북한군이 산속으로 숨어들어 소규모 게릴라 활동을 하는 이른바 '빨치산'의 모습도 나타난다.

그는 51년 3월 9일 일기를 통해 "보은까지 오는 도중 도로변도 몹시 파괘되었다 어재 저녁부터 포성이 은은히 들리며 오는대 지방인의 말을 들으니 보은군 북방30리에 있는 속리산에서 공비잔적을 소탕하는 중이라고 한다"는 구절이 그렇다.

또 51년 3월 6일 일기에는 "금오산(경상북도 구미시·칠곡군·김천시의 경계에 있는 산)은 무참히도 전화를 입어 완전히 소화되어 버린 채 있었다"는 구절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이 표현돼 있다.

■ 국민방위군 교육대·50년대 생활상

-급조된 국민방위군 교육대는 정병을 양성할 역량이 없었다. 부정한 방식으로 국민방위군이 받아야 할 물자가 착복돼 열악한 환경 속에서 폭력적인 방식으로 훈련이 진행됐다.

"주식후 겁내며 기다리든 무서운 기합을 받았다 이유는 변소사번이 불찰하여 청결정돈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 개인적으로 잘한 사람도 있으나 대대 전체적으로 보아 불미하니까 연대기합을 받으라는 것이다. 약 20회 엎두러뻐처를 하곤 장작개비로 다섯 대식 맞었다"(51년 1월 10일)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유엔군이 주요 도로를 보급로로 사용하며 민간인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에 국민방위군은 산길 등을 통해 교육대로 이동해야만 했다. 제대로 보급품을 받지 못한 여정이었기에 인근 민가에서 도움을 받는 일이 허다했다.

50년 12월 25일 일기에는 "주인 왈 먼저 통과한 부대들의 난복이란 말할 수 없다 수저는 모다 잃고 그릇도 깨틀고 자기네 세도만 믿고 부량을 부리고 하니 하니곱고 귀찮아 영업을 중지한다고 하며 지방 아는 손님이 오면 방으로 모셔 슬그머니 대접한다"는 구절이 있다.

보급이 없다 보니 유씨는 징집 당시 가져온 돈으로 식사를 해결하곤 했다. 인절미(50년 12월 26일)를 사먹거나 교육대에서 외출할 때 음식을 사는 방식이었다.

51년 1월 7일 일기에는 "외출은 대대장 혹은 주번사령의 허가 없이는 엄금이다. 그래서 울타리 사이로 도식(암매식)하는 자가 많다. 들키기만 하면 기합(?)이다. 그래도 암매식한다"는 구절에서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내 슬쩍 외출하여 탁주일배를 하였더니 기분이 좋다 주가부억에서 '다찌노미'(입음)을 할 때 살광(선반을 가리키는 경기방언)에 놓인 '고치장'의 맛. 집을 떠난지 처음 먹어보는 '무상치'의 맛이란 각별하다"(51년 1월 9일)는 기록이 있다.

다찌노미는 서 있는 상태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식당을 이르는 말로 당시까지 남아 있던 일본문화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

/김태성·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