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유럽 귀족 청년들 '견문유람' 관습
현대적 의미 '패키지 여행'으로 발전 계기
코로나사태 왕래 막히며 동양인차별 행태
올 여름휴가는 우리문화·둘레길 탐방을…


이진호
이진호 인천본사 사회부장
상업이나 군사적 목적이 아닌 인류가 본격적으로 해외여행에 나선 것은 17세기 말 영국과 독일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주로 재정적으로 풍요로웠던 영국과 독일의 귀족 출신 젊은이들이 유럽 일대와 멀게는 아시아 서쪽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때 생겨난 말이 '그랜드 투어(grand tour)다. 당시 유럽 귀족의 여행 목적은 여가나 휴식보다 견문을 넓히는 성격이 강했다. '그랜드 투어'의 최고 인기 여행지는 이탈리아였다. 유럽인들이 이탈리아를 최고의 여행지로 꼽은 이유는 르네상스 문화유산과 가톨릭의 본거지이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남종국 교수는 공동 저서 '18세기 도시'에서 "거장의 걸작을 직접 느껴보려는 예술가들, 연구 자료를 찾으려는 인문주의자들, 영혼의 구원을 갈구하는 독실한 가톨릭 순례자들은 모두 이탈리아 여행을 간절히 꿈꿨다"며 "돈 많은 귀족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서 마차, 하인, 가이드, 숙소를 모두 제공하는 현대적 의미의 '패키지여행'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라고 했다. 18세기에는 로마, 파리, 베네치아, 밀라노를 모르면 영국 신사가 될 수 없었다고 한다.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 "영국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에 보내지 않고 곧 그들을 외국에 여행 보내는 것이 점점 하나의 관습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 여행을 통해 일반적으로 대단히 발전해서 귀국한다"고 쓰기도 했다.

여행은 낯선 곳을 찾아가는 설렘과 기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의도치 않게 전염병을 옮기는 수단이기도 했다. 인류·역사학자들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이후 한두 세기에 걸쳐 남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인구 중 최대 95%가 감소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희생된 남아메리카 원주민도 많았지만, 그들이 옮긴 질병(세균)에 희생된 원주민들이 더 많았다. 1520년 남아메리카 정복에 나선 에스파냐의 코르테스는 적은 수의 군대를 이끌고도 '천연두'로 아즈텍인들을 몰살시켰다. 코르테스와 함께 '천연두'에 감염된 노예가 멕시코에 도착하면서 유행병이 무섭게 퍼졌다. 당시 '천연두'만으로 절반에 가까운 아즈텍족이 몰살됐고, 인구 2천만명에 이르던 멕시코인은 한 세기만인 1618년 160만명으로 줄었다. 일부 백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몰살시킬 목적으로 천연두 환자가 쓰던 담요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후 1880년대 들어서 백인들이 아메리카에 자리 잡으면서 그들이 앓고 있던 병원균 중 하나인 '결핵'으로 원주민들은 연평균 9%라는 엄청난 비율로 죽어갔다.

코로나19 발병 이후 상당수 나라가 급속도로 번지는 바이러스를 차단하기 위해 외국인 입국을 막았다. 이후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동양인에 대한 '코로나 인종차별'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영국 정부가 조사한 결과 동남아시아인들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가 코로나19 발생 직후 21%가량 증가했고, 인종차별 사고 신고 건수도 전년도 동일 기간 대비 3~4배가량 늘었다고 한다. 미국과 독일에서도 우려스러운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18세기 영국과 독일의 젊은이들은 신사가 되기 위해 외국의 문물을 배우러 '그랜드 투어'에 나섰다. 일부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자신의 나라를 찾은 동남아시아인들에게 꼴사나운 '코로나 인종차별' 행태를 보이고 있다. 코로나19가 안정되더라도 해외여행은 예전처럼 활기차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극단적인 생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새로운 전염병이 발병할수록 동양인을 차별하는, 백인들만을 위한 '그랜드 투어'나 '패키지여행'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심각한 코로나19 사태 속에 외국 관광객을 반겨주는 나라가 얼마나 되겠는가. 올 여름휴가는 '답사기행문'을 들고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돌아보거나, 산천 곳곳에 잘 정비된 아름다운 둘레길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이진호 인천본사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