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출신으로 월남하다 대구서 입소
공처럼 던져 준 주먹밥 주워 먹기도
"터질 수밖에 없는 사건" 심경 밝혀
'국민방위군'(6월 15·16·17·18일자 보도) 기획보도 이후 이 사건 생존자의 첫 증언이 나왔다. 경인일보 제4·5대(1967~1971) 편집국장을 역임한 이창식(1930~) 전 국장의 구술을 토대로 대구와 부산 지역 국민방위군 사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30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 전 국장은 중공군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진 1950년 12월 8일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 이 전 국장은 서울 아현동, 인천 지역에 머물다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대구까지 내려가게 된다.
이북 출신에 연고가 없던 그는 당시 대구 시내에서 모집 중이던 국민방위군에 지원하게 됐다.
이 전 국장은 "대구 거리에 나가보니 제2국민병이라고 해서 나이 든 사람을 붙들어 가더라구. 그때 국민방위군 개념이 뭐인고 하니 제2국민병으로 해서 국군으로 가면 전장으로 가야 하고 국민방위군은 '지게부대'라고 해서 후방 지원하는 군대라고 해서 되도록이면 안전한 쪽으로 가려고 국민방위군에 들어간 거지"라고 증언했다.
당시 대구에는 국민방위군 사령부와 제27교육대가 위치했다. 이 전 국장은 모 초등학교 강당에 마련된 교육대에 입소했는데, 환경이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1월이니 엄청 추운데 방한 장치도 없고 가마니 두겹을 바닥에 죽 깔아 놓았더라고. 그러면서 밥을 주는데 500~600명 사람들 앞으로 지나가면서 주먹밥을 야구공 던지듯이 하나씩 던지는거라. 캐치하면 먹을 수 있지만, 데구루루 구르면 떡에 고물 묻듯이 볏집 가루가 묻어버려요. 그걸 안 먹을 수 없어서 주워 먹었지. 두 사람 당 모포 1장을 주는데 난방시설이 없는데지만 몇 백 명이 되니까 겨우 체온을 유지했지"라고 말했다.
부산 동래로 이동한 뒤에도 참혹함은 이어졌다.
"남쪽이라 그런지 대나무가 많았는데 총이 없으니까 훈련을 한답시고 죽창 그걸로 '찔러' 하는 게 다였어. 조선시대도 아니고 목총을 만들어 훈련을 할 정도였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이 사건은 터져야 마땅하고 터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지"라며 70년 전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말 속에 당시의 답답함이 묻어나왔다.
/김태성·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