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우량 선생 묘소서 발굴 묘지 2기
'동국진체' 완성한 조선후기 이광사 작품
문화와 문명 발전시켜 온 기록의 힘 증명
새로운 인천 문화정책 구현 가늠자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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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오 인천본사 편집국장
얼마 전 인천에서는 작지만 매우 귀한 발굴 작업이 있었다. 지난 6월 11일, 인천 연수구 동춘동 영일 정씨 묘역에서 묘지(墓誌) 발굴이 이루어졌다. 우의정을 지낸 정우량(鄭羽良, 1692~1754) 선생의 묘소에서 2기의 묘지가 나왔다. 옥으로 깎았으며 글씨는 붉은색으로 새겼다. 가로 37㎝, 세로 42㎝, 두께 9㎝ 정도였다. 이번 묘지 발굴이 눈길을 끈 것은, 인천에는 무덤 밖에 세우는 묘갈(墓碣)은 다른 지역에 비해 적을 것도 없거니와 수령들의 선정비를 모아 놓은 비석군은 4곳이나 돼 유난히 많은데 무덤 속에 묻는 묘지는 거의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정우량 선생 묘지는 그 글씨가 조선 후기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것이어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묘지는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기록이자 기념물이다. 무덤 안에 묻는다는 점에서 묘소 앞에 세우는 묘갈과는 다르다. 수해로 인하여 묘역이 훼손되어 바깥의 석물들이 쓸려 내려갈지라도 끝까지 남아 묘소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려는 목적도 묘지는 갖고 있다. 따라서 묘지는 무덤의 주인공 신원 확인을 위한 이중 장치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지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꾸민 묘갈은 묘소의 주인 행적을 약간이라도 과장하게 마련이지만, 땅속에 묻는 묘지는 죽은 이 스스로가 늘 보도록 한다는 점에서 매우 사실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묘지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자 기억의 동물이다. 사람들이 지난 일을 잊지 않는다면 머리 아프지 않고 두통 없이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 잊지 않는다면 인공지능 컴퓨터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서 잊기도 하고, 일부러 체념하듯 잊기도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잊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를 쓰고 잊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 글로 남기고, 기념물을 세우고 하는 게 다 그 일환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것들도 예전에 쓴 일기 한 토막이나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보고 나면 영화처럼 생생하게 다시 펼쳐지기도 한다. 이게 바로 기록의 힘이다. 인간이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기도 하다.

정우량 선생 묘지에 글씨를 쓴 이광사는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명필이다. 이광사는 18세기 우리나라 문예부흥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서예에서의 동국진체를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이광사 집안은 강화학파의 큰 줄기를 이룬다. 하곡 정제두에게서 이광사에게로 전해진 학맥은 한 집안 관계인 이건창, 이건승, 이건방 등으로 이어졌다. 그렇기에 정우량 선생 묘지는 그 자체로 강화학파의 정신과 인천의 명문가 집안 내력이 하나로 뭉쳐 있는 보석이라 할 만하다.

묘지는 오랜 전통의 기록문학 장르이면서 기념물이다. 주로 옥돌을 깎아 만들었으며 내용은 죽기 전에 스스로 쓰기도 했고, 잘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그 대상이나 형식도 다양하다. 고려 시대 묘지를 보면, 딸이나 부인들의 것들도 많다. 당시의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천대받지 않았음을 이들 묘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조선 숙종 시기 호위대장을 지낸 김주신(1661~1721)은 부모의 묘역에 묻은 묘지에 한글로 덧붙이는 말을 적어 넣기도 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어 이 묘지가 드러났을 때 한글만 아는 농사꾼이나 나무꾼일지라도 부모의 묘소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려는 방비였다.

정우량 선생 묘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문가들에 의해 곧 밝혀질 일이다. 이번 발굴이 우리 기록 문화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원교 이광사와 강화학파, 그리고 정우량 선생이 누구인지를 살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동안 인천은 문화 예술이 약하다는 소리를 달고 살았다. 이번에 무덤에서 나온 아주 작은 옥돌 2기가 그 긴 세월을 뚫고 새로운 인천의 문화 정책을 구현하는 가늠자가 되었으면 한다.

/정진오 인천본사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