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전 인현동 모티브 김금희 소설 대목이다
핵심은 비행이 56명 죽음을 덮을수 없는 법
라면 형제 '뒤늦게 실화'도… 본질 안바뀌어
소설 '경애의 마음'(김금희 作) 중 한 대목이다. 주인공 경애와 상수는 21년 전인 1999년, 대형 화재 참사가 발생한 인천 인현동 호프집에서 살아남은 이들이다. 인현동 화재사건을 취재한 기억으로 인해 이 소설이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숨진 학생들에 대한 애도' 보다 '학생이 호프집에서 술을 마신 행위'에 대한 비난이 앞섰던 게 사건 초기의 사회 분위기였다. 소설도 경애의 사유를 통해 당시 상황을 묘사한다. "경애는 비행, 불량, 노는 애들이라는 말들을 곱씹어보다가 맥주를 마셨다는 이유로, 죽은 56명의 아이들이 왜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생각했다. 그런 이유가 어떤 존재의 죽음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로 대단한가. 그런 이유가 어떻게 죽음을 덮고 그것이 지니는 슬픔을 하찮게 만들 수 있는가."
사고 발생 후 며칠이 지나 기성세대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사뭇 다른 공간을 취재한 적이 있다. 화재로 숨진 남녀 고교생의 영혼결혼식이 열린 길병원 영안실이었다. 남학생은 다른 아이들을 도와주다 변을 당했고, 여학생은 반에서 1~2등을 다투던 모범생이었다고 했다. 단지 호프집에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 도무지 비행, 불량이라는 수식어를 달 이유를 찾지 못한 열일곱, 열여섯의 꽃다운 영혼이었다.
"두 젊은 영혼이 지금 영정으로 만나지만, 이 모순되고 부도덕한 사회에 경종을 울리며 함께 스러져간 인연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닙니다."
주례의 결혼 선포로 사돈이 된 두 아버지는 신랑, 신부를 대신해 흑장미와 순백의 국화를 교환했다. 생판 모르고 지내던 사람들이 처음 인연을 맺는 현장은 잔인하리만치 처연했다. 편견으로 오염된 바깥 공기와는 확연히 달랐던, 그리고 그 누구라도 가슴으로 추모할 수밖에 없었을 그 슬프고 외로운 결혼식장이 소설을 읽는 사이 떠올랐다. 이 때문인지 소설은 '맥주를 마셨다는 이유로 왜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라는 경애의 울분 어린 질문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답했는지 묻는 듯했다. 사실 그 질문은 미세먼지와도 같았던 편견이 걷히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사회가 공유할 수 있었다. 그 질문의 결과물이 지난해 인현동 화재 참사 20주기를 맞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공적기억조형물 '기억의 싹'이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20년의 대한민국은 또 하나의 화재사건에 주목했다. 코로나19로 인해 학교에 가지 못한 초등생 형제가 '라면을 끓이다 참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인천 미추홀구 화재사건이다. 동생은 세상을 떠났다. 소설 속 표현대로 '무한과 무수' 사이에서 건져 올려지지 못했다. 이 사건을 접한 많은 언론은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의 '무사함'을 담보하지 못하는 돌봄시스템에 돋보기를 들이댔다. 그리고 많은 제도개혁을 이끌어냈다. 형제를 돕기 위한 후원의 손길도 잇따랐다. 최소한 인현동 화재처럼 뒤늦게 기억의 싹을 세우는 것으로 희생자들을 위로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최근 경찰이 "화재의 원인은 아이의 실화였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조그만 파장이 일고 있다. 라면을 끓이다 발생한 것이 아니라 아이의 불장난으로 인한 화재라는 새로운 분석이 제시되면서 일부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소 흔들리는 듯하다. 물론 언론의 잘못이 크다. 정확한 조사결과가 나오기 전에 소방당국의 추정을 토대로 화재원인을 특정한 것은 분명 반성할 일이다. 그렇다고 이 사건의 본질과 의미가 희석될 수 있을까. 이 사건은 구멍 숭숭 뚫린 돌봄시스템으로 인해 발생한 참사라는 게 핵심이다. 화재 원인이 다르다고 해서 본질이 바뀔 수도, 바뀌어서도 안되는 사건이다. 어찌보면 호프집에 가거나 불장난을 한 행위는 시스템 부재라는 근원적 참사 원인과 비교할 때 편린에 불과하다. 기억의 싹을 제대로 심어야 할 것 같다.
/임성훈 인천본사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