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 10만권으로 만들어진 '책의 파르테논'
장소는 나치가 독재옹호 책 불태운 곳 카셀
시대마다 '정치·신앙 등 해친다' 낙인 자행
홍콩이어… 우리나라도 금서 DNA는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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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 인천본사 사회부장
2017년 8월 독일 소도시 카셀에서 열린 현대 미술 박람회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작품은 아르헨티나의 행위예술가인 마르타 미누힌의 '책의 파르테논(The Parthenon of Books)'이다. 이 작품은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을 본떠 10만권의 책으로 설치돼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책의 파르테논'이 상징하는 의미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작품에 사용된 10만권 모두 전 세계에서 금서(禁書)로 낙인된 책으로 독일 시민들로부터 기증받았다는 것. 두 번째는 '책의 파르테논'이 세워진 카셀의 프리드리히 광장은 1933년 5월19일 나치가 지정한 금서 2천권을 불태웠던 상징적인 장소라는 것이다.

마르타 미누힌은 언론 인터뷰에서 "세계 최초로 민주주의를 꽃피운 아테네의 상징인 파르테논을 금서로 만든 것은 나치가 독재를 옹호하기 위해 책을 불태운 곳에서 평화와 민주주의,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1933년 독일 나치는 카셀의 프리드리히 광장 등 전국 대학가 주변 100여곳에서 책을 불태웠다. 불에 탄 책들은 문학, 역사, 정치 등 분야별 3천종에 달했다. 나치는 이후에도 1935년부터 정기적으로 발간되었던 1만2천400종의 도서 그리고 인도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성향을 가졌거나 유태인 저자 149명의 모든 저술 등을 금서로 못 박았다.

종교도 금서에 자유롭지 않다. 1571년 교황청은 아예 '금서성(禁書省)'을 설립했다. 인쇄술이 발달한 이후 소위 불온서적 출간이 유행하자 교황청은 들불처럼 번지는 종교에 대한 도전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교황청은 금서성 설치 이후 1600년 지구가 돈다고 주장했던 이탈리아 철학자 브루노를 화형시켰다. 1633년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을 받은 이후 교황청은 4천권이 넘는 책을 1948년까지 금서 목록에 실었다.

종교 관련 서적 중 대표적인 금서로 꼽히는 책은 '세 명의 사기꾼, 모세·예수·마호메트'이다. 모세와 예수, 마호메트를 사기꾼으로 묘사해 불경한 책으로 불리는 이 책은 오늘까지도 문헌의 저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이 책은 가톨릭을 신봉하는 유럽의 왕조들의 서슬 퍼런 검열을 피해 오로지 손으로 베낀 형태로만 극히 제한적으로 유통됐다.

책의 내용이 가톨릭과 기독교, 이슬람교의 최고 지도자들을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대놓고 떠들어댔으니 저자는 물론이고, 책을 베낀 이들조차 적발당하면 화형을 피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18세기는 계몽주의 사상을 곁들인 권력을 쥔 왕족·귀족·성직자들의 추문을 비하하는 책들이 유행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은 저서 '책과 혁명'에서 프랑스혁명 직전까지 금서가 된 베스트셀러를 보면 왕정을 비방하거나 권력자와 성직자들의 파렴치한 추문을 들춰냈다. 특히 집단으로 거물급 인사에 대한 명예를 공격하는 중상비방문(벽보, 광고, 노래, 인쇄물, 소논문 또는 책)들은 1789년 7월 프랑스혁명의 불을 지폈다. 그 대표 주자가 바로 자유와 평등을 강조한 계몽사상가 루소와 관용(똘레랑스)의 중요성을 강조한 볼테르다.

어느 시대, 어느 정권이나 금서로 낙인찍는 주된 이유는 정치·안보·사상·신앙·풍속 등을 해치기 때문이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의 분서도 같은 이유로 자행됐다. 하지만 금서와 분서는 오늘날까지도 인종, 이념, 자유언론에 대한 탄압과 특정집단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핵심은 "옛것으로써 오늘날의 것을 비난하는 자는 멸족시키고, 관리가 (이런 자를) 보고 알면서도 들춰내지 않는다면 같은 죄를 묻는다"는 것이다.

지난 7월5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은 "홍콩보안법 시행 이후 홍콩내 공공도서관에서 민주화 인사의 저서가 모두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홍콩의 공공도서관을 담당하는 기관은 "홍콩보안법 시행에 따라 일부 서적의 법 위반 여부를 심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공공도서관이 정치인과 시사 평론가들이 출간한 책들을 정치편향 이유로 금서로 지정했다고 한다. 21세기 민주주의에서도 금서의 DNA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진호 인천본사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