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올해도 어김없이 3·1 독립만세운동을 기리는 3·1절을 엄숙하게 기렸다. 102년 전의 3·1운동은 국내외 한민족 전체가 일본 제국주의를 향해 독립을 선포한 민족 항쟁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의 초석이 됐다. 하지만 일제의 총칼에 희생된 3·1운동 독립유공자에 대한 국가적 예우만 떼어 놓고 보면 여전히 미완의 역사다. 조국의 호명을 기다리는 무명의 독립영웅들이 부지기수라서다.

3·1운동에서 유난히 무명의 독립지사들이 많은 이유는 거족적인 운동의 규모와 무관하지 않다. 반면에 일제 식민지 한민족에겐 독립운동을 기록할 행정력이 전무했다. 비단 3·1 독립운동뿐 아니다. 이후 전개된 국내외 독립운동의 역사도 제대로 기록할 수 없었다. 활약이 뚜렷한 영웅들이 서훈을 받은 반면 무명의 영웅들이 역사 속에 사장된 이유다. 역사 속에서 새롭게 발굴된 독립영웅들이 해마다 새롭게 서훈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화성 출신 홍헌은 일제가 송산지역 3·1 만세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200여호의 가옥을 불사르자, 목재를 지원해 재건을 도왔다. 증명할 문서도 있다. 종로경찰서에서 고문당한 증언도 있다. 역시 화성 만세운동을 주도한 차경규는 옥고를 치렀다. 만세운동을 저지하는 일본 수사부장을 처단했던 홍열후도 있다. 하지만 모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모두 화성시가 발굴한 독립운동가들인데 국가는 기록의 부실과 부재를 이유로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2019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잊힌 독립운동가 2천60명을 찾았다. 국가보훈처가 지난 5년간 여러 기관에 위탁해 발굴한 규모와 맞먹는 숫자다. 이중 644명이 2차 심사에 올라 이번 3·1절에 68명이 국가 포상을 받았다. 해외 사료 발굴을 위한 전문인력이 부족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한 대학이 사명감만으로 찾아낸 결실이니 놀랍다.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무명의 독립영웅들을 찾아 명예를 높이는 일은 국가의 의무이다. 3·1 운동은 전국에서 벌어진 만큼 잊힌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찾기 위해서는 각 지방자치단체의 향토사료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인천대의 경우처럼 독립운동사 발굴에 특화된 기관에 대해서는 국가의 지원을 아낄 이유가 없다. 정부는 잊힌 독립영웅들을 찾기 위한 입체적인 독립운동 역사 복원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