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과음이라도 했을땐 시원한 국물 최고
아동 학대사망·토지투기 등 우울한 소식에
마스크쓴 국민 답답함 풀 봄 바람이라도…

어설픈 미식가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점심 한 끼를 먹는 것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뭐 대충 아무거나 먹지" 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AI(인공지능)에 뒤지지 않은 정보처리 능력을 발휘한다. 그들이 메뉴를 선택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보면 이렇다. 1단계, 자신의 공복 상태를 살피고 전날 먹은 음식과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배려한다(그날 날씨와 기온도 중요하다). 2단계, 머릿속에서 현 위치에서 최단거리 내에 입맛에 맞는 음식점을 검색한다. 3단계, 함께 식사하는 일행들의 입맛을 고려한다(최대한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한데 그래야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칭찬을 받을 수 있다). 4단계, 머릿속으로 음식점을 정하면 동료들에게 "거기 식당이 음식이 정갈하고 먹을만하다"며 은근히 맛집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다. 5단계, 이미 발걸음은 머릿속으로 정한 식당으로 향하고 있다(동료들도 무난하다 여기고 자연스럽게 따라간다).
신기한 것은 이 다섯 단계가 불과 2~3분 이내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한 식당에 가면 이 어설픈 미식가는 동료들의 반응을 살핀다. "괜찮은데"라는 반응이 나오는 순간 미식가로서의 자부심을 느낀다. 겉으로는 대충 때우는 것처럼 보여도 점심 한 끼도 최소한 맛을 내는 음식을 찾다 보니 맛없는 음식이 있을 수 없다.
집 밖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사람들에겐 메뉴 선택은 늘 고민이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기준은 전날 저녁 음주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다른 건 차치하고 술자리를 가진 것을 전제로 보면 해장음식은 크게 얼큰함과 담백함 두 가지로 나뉜다. 대표적인 얼큰한 해장음식으로는 육개장, 짬뽕, 감자탕, 부대찌개, 생선이나 해물로 끓인 매운탕 등이 있다. 담백한 것은 설렁탕, 북엇국, 콩나물국, 우거지 해장국, 황태해장국, 순댓국, 연포탕(낙지탕), 갈비탕, 굴국밥, 매생이국, 재첩국, 죽 종류 등 얼큰한 것에 비해 종류가 많다. 의외로 냉면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다. 대부분 애주가다. 냉면이 나오기 전 따뜻한 면수에 간장이나 까나리액젓을 넣어 속을 살짝 달랜다. 그리고 위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이 소주나 막걸리 한 잔에 시원한 냉면육수로 마무리하면 그런대로 응급처치할 수 있다.
숙취로 속이 좋지 않을 때는 익숙하고 편안한 음식을 찾게 마련이다. '속풀이'는 전날 마신 술로 거북해진 속을 가라앉히는 일. 또는 그런 음식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 해장음식은 영혼을 감싸주는 '소울푸드'다. 해장음식을 찾는 이유는 뜨거운 국물이 주는 '시원함' 때문이다. 몸이 상쾌해지고 개운함을 느낄 때 "시원하다"고 말한다. 속이 시원하다고 하는 것은 답답한 것이 풀리고 후련함을 느낄 때다. 시원하다는 것은 온도의 개념보다 느낌의 개념이다.
새해 덕담을 나눈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월 중순을 넘기고 봄이 오고 있다. 지난해 이맘때부터 1년 가까이 "시원하다"는 말을 시원스럽게 들어본 적이 없다. 식당 벽면에 "식사 중에도 얘기를 나누려면 마스크를 써달라"는 안내문을 보면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답답하다. 어린 자녀가 부모의 방치와 학대로 목숨을 잃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마음 한 편으로 끼니를 챙기는 것이 미안하게 느껴진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들과 정치인들의 부동산 투기 소식에 밥벌이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의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쓰린 속은 해장음식으로 달랠 수 있지만, 국민들의 답답한 속은 무엇으로 풀어야 하나. 오는 봄,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불어주었으면 좋겠다.
/이진호 인천본사 디지털취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