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망우리공원 죽산 묘역서 추모 행사 진행 예정
이승만 장기 집권 위협하는 존재 떠오르자 간첩 누명 쓰고 사형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한줄 나온 부정확한 기사 때문에
10년이 넘도록 '독립유공자 추서' 해결되지 않아
이승만 장기 집권 위협하는 존재 떠오르자 간첩 누명 쓰고 사형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한줄 나온 부정확한 기사 때문에
10년이 넘도록 '독립유공자 추서' 해결되지 않아
인천 강화도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정치계 거목인 죽산 조봉암(1899~1959) 선생의 62주기가 다가왔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죽산의 뜻을 기리는 각계각층의 추모 물결이 이어지겠지만, 국가가 선생의 명예를 회복하는 최종 단계라 할 수 있는 '독립유공자 추서'는 해결될 기미가 없다.
(사)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는 조봉암 62주기인 31일 오전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 죽산 묘역에서 추모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올해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공식 추모식은 갖지 않고, 참석한 사람들의 묘소 참배로 간소화한다. 죽산의 추모 행사는 해마다 인천시와 새얼문화재단이 돕고 있다.
조봉암은 젊은 시절 고향 강화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해방될 때까지 사회주의자로서 항일운동에 투신한 조봉암은 해방 이후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과 갈라서면서 사상적 전향을 선포하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면서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았다.
조봉암은 2·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2위를 차지하는 등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떠올랐다. 그러던 중 조봉암은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한 이후 간첩 누명을 쓰고, 1959년 사형이 집행됐다. 대법원은 2011년 재심에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간첩죄로 '사법살인'을 당한 죽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죽산의 사면 복권 후 10년이 넘도록 서훈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항일운동과 건국 등에 공훈이 뚜렷함에도 해방 전 인천에 살던 시기 나온 한 줄의 신문기사를 이유로 친일 흔적이 있다며 서훈을 보류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신문에 실린 '국방성금 150원 헌납' 기사가 서훈 보류의 근거다. 하지만 해당 기사는 부정확하다는 게 여러 연구자의 분석이고, 이를 뒷받침할 증언도 많다. 우선 여러 일본 공문서 등을 보면 해당 기사에 나오는 조봉암의 주소가 틀렸다. 조봉암이 냈다는 국방성금 150원을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수천만원에 달하는데, 당시 죽산은 이렇게 큰돈을 마련할 여력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조봉암은 1945년 1월 일제의 '예비구금령'으로 용산 헌병사령부에 체포돼 8월 15일 해방까지 옥에 갇혀 있었다. 그가 친일 인사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봉암이 해방을 맞아 풀려난 8월 15일 인천 도원동 자택 주변에는 그를 환영하는 인파가 1천여 명이나 몰렸는데, 이는 그가 친일이 아닌 항일 지도자였다는 명확한 증거다.
죽산 연구자들은 조봉암의 일제강점기 공산당 활동 경력이 복원 이후에도 서훈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기도 하다. 조봉암의 서훈 문제는 잊힌 독립유공자를 지속해서 발굴하고 우대한 현 정부 보훈정책의 마지막 과제라는 지적이 많다.
죽산 연구자들은 조봉암의 일제강점기 공산당 활동 경력이 복원 이후에도 서훈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기도 하다. 조봉암의 서훈 문제는 잊힌 독립유공자를 지속해서 발굴하고 우대한 현 정부 보훈정책의 마지막 과제라는 지적이 많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