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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종 서울취재본부장
산사의 한 스님으로부터 '먹물 참회'에 대한 법문을 들은 적이 있다. 투명한 물 한 잔이 갓 태어난 아기의 마음이라고 할 때, 살아가면서 욕심과 근심에 거짓말도 하게 되고 나쁜 짓을 하게 되면, 그 크기만큼 먹물이 떨어져 새까맣게 변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의 얘기인데, 나이 들어 유년시절과 청년기를 보내면서 방황하고, 때론 가출해 남의 물건에까지 손을 대면서 어느새 돌이킬 수 없는 '먹물 인생'이 됐단다. 새까매진 물잔(삶)을 깨끗하게 하려면 그냥 버릴 수도 있지만 새 물을 계속 부어 정화할 수도 있다. 이후 출가한 스님은 긴 세월 켜켜이 쌓인 업장을 녹이는 일에 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이제 번뇌와 미혹의 괴로움에서도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됐다.

국민의힘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지금 야당이지만 우리 정당사에 여당으로 가장 오래 유지한 수권 능력이 있는 정당이다. 그러나 지난 2002년 대선 때 기업으로부터 차떼기로 돈을 받아 대선을 치른 사실이 알려져 '멸문지화'를 당하며 사실상 당을 해체한 적이 있다. 당시 당 쇄신파를 중심으로 혁신에 나서면서 당사를 팔고, 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고 서울 시유지에 천막당사를 지어 풍찬노숙했다. 국민과 역사 앞에 석고대죄하고 죗값을 치른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에 업보를 털어내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탄생이었다. 


막말·급 나누기… 갈수록 경선판 '난장판'
윤·최, '대세' 선점 꼼수 부린다면 화 자초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으로 정권을 교체했지만 이도 잠깐. 권력의 뒤에선 친이(친 이명박)·친박(친 박근혜) 계파싸움과 내분이 이어졌고, 결국 오만과 독선적 권력에 취해 국민의 눈에서 멀어졌고 무능 정권으로 낙인 찍혀 사상 유례없는 '탄핵'을 맞았다.

탄핵 후 그들은 참회했는가. 국민 속으로 들어갈 만큼 지난 잘못을 씻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궤멸의 길로 가고 있으나 인지하지 못하고 4번의 선거에서 판판이 깨질 때 국민에게 감동을 줄 만큼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속된 말로 목숨 걸고 현 정권의 불의에 맞서는 사람도 안 보였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변변한 대권 주자도 없지 않았나.

그나마 다행인 건, 문재인 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사이익이 커지고, 이제 정권교체 지수마저 높아져 나름대로 견제와 균형감이 맞춰졌다. 소위 말하는 '윤석열 현상'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현 정권에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버텨내고 많은 국민 지지 속에 강골 검사 이미지로 지지율을 끌어 올리며 굳건한 야권 1위 후보가 됐다. 월성1호기 경제성 조작 사건을 감사해 현 정부와 맞섰던 최재형 전 감사원장도 마찬가지. 두 사람 모두 현 정권의 불의에 맞서 몸을 던진 인물이다. 그래서 야권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됐고, 이들을 부른 사람도 국민의힘이었다.

국가 미래·비전·정책 밝히고 선택 받아야
그게 국민들에게 참회하는 마지막 카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경선판은 난장판이 되고 있다. 처음엔 지지율 반등을 꾀하는 후순위 주자들이 1등(윤석열) 후보의 '줄 세우기'를 비판하며 난타를 가하더니 이제 '당을 궤멸시킨 사람'으로 격하게 몰아세우고 있다. 입에 담기 어려운 막말까지 나오기도 한다. 공격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는지, 윤 예비후보 측은 당 지도부가 추진하는 대선후보 토론회 불참을 검토하는 듯하다. 캠프에 나눠진 당내 인사들끼리 서로 돌고래·고등어·멸치 후보로 급을 나누더니 결국, 대선 출마한 13~14명과 한자리에 모여 '스파링'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린 것 같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윤·최 후보는 정치 무대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이다. 불의에 맞서 싸우며 야권의 지지율을 끌어 올린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의 지지율로 '대세'를 선점하려는 꼼수를 부린다면 더 큰 화를 자초할 것이다. 지지율은 사우나의 수증기와 같다는 어느 후보의 말이 와닿는다. 지금 여론조사 순위가 끝까지 가라는 법도 없다. 벌써 정권 다 잡은 사람처럼 행세하면 안 된다.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보수 우파 진영에 재 뿌리지 말고, 국가의 미래와 비전, 이를 실현할 정책을 국민 앞에 밝히고 선택받아야 한다. 그게 국민들에게 참회하는 마지막 남은 카드다.

/정의종 서울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