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출장 도중 숨져 중국 법원에서 산업재해를 인정 받은 한 40대 가장의 유족이 한국 법원에 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패소했다.
유족은 중국법원은 인정한 사측의 귀책을 한국 법원이 외면했다며 상급심에 재판단을 구하는 항소를 제기했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수원지법 민사8단독 이종민 판사는 김모(사망 당시 48세)씨의 아내 강모(47)씨와 딸 김모(21)씨가 김씨가 재직하던 화성시 소재 기계 제조업 회사 M사를 상대로 낸 산업재해 민사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M사 생산부 이사로 재직하던 김씨는 지난 2019년 4월18일 동료와 함께 중국 광라오현의 S사에 핫멜트(hot melt) 합지기 설치를 총괄하다 지게차에서 떨어진 설비에 머리를 부딪히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 도중 숨졌다(2020년 10월2일 인터넷판 보도=[사건줌인]중국 출장 중 가장 잃은 모녀의 쓸쓸한 한가위). 합지기는 필름이나 얇은 플라스틱을 압축하거나 가열, 부착해 합치고 다시 롤 형태로 감아주는 장비를 의미한다.
김씨의 아내 강씨는 세월호 참사 유족의 트라우마 심리치유 프로그램을 맡았던 심리치료사였는데, 2019년의 그 아픈 4월엔 남편을 잃는 기구한 일을 겪고 말았다.
현지 법원엔 중국의 거래처 회사 S사를 상대로 산업재해 민사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한국 법원엔 김씨가 몸담았던 M사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유족은 M사가 사고로 숨진 남편에게 안전배려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며 2억2천여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법원에 청구했다.
원고 측은 구체적으로 M사가 남편에게 사전에 기본적인 안전교육을 시행하지 않은 점, 설치작업지도서조차 제대로 교부하지 않은 점, 크레인으로 작업을 해야 하는데도 지게차를 이용해 작업을 진행하게 하면서 당초 계획과 달리 설비를 역순으로 설치하며 난이도와 위험성을 높인 점 등을 사측의 귀책 사유로 들었다.
하지만 한국 법원은 가족을 잃은 유족을 재차 절망에 빠뜨렸다.
1심 재판부는 근로자에 대한 보호 의무를 부담하는 사용자에게 해당 근로로 인해 신체 상 재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는데도 회피를 위한 별다른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은 과실이 있어야 하고, 과실의 존재 입증 책임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근로자에게 있다는 대법원 판례(99다60115)를 전제로 '사측이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이 판사는 "망인(숨진 김씨)은 이 사건 기계의 설치를 기획하고 설치 당시 현장 책임자로 회사가 설치작업지시서를 작성·교부하지 않은 사실은 인정되나, 사측이 작업지시서 작성·교부의 의무를 부담한다는 법규나 내부규정 등에 관한 아무런 주장·입증이 없고, 작업지시서의 유무가 이 사건 사고와의 인과관계가 있다고도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어 "망인이 피고(회사)의 지시에 따라 크레인이 아닌 지게차를 이용해 작업을 했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고, 오히려 현장 책임자인 망인의 판단 하에 지게차를 이용한 작업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며 "피고에게 보호의무 내지 안전배려의무 위반에 따른 책임을 묻는 원고들의 이 사건 청구는 그 손해액 등에 관해 더 나아가 살필 필요 없이 이유 없다"고 원고 패소 이유를 설명했다.
앞서 중국 광라오현인민법원은 유족이 중국 현지 S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근로자의 인신 손해에 대해 배상권리자가 제3자에게 민사배상 책임을 청구하면 인민법원은 응당 지지해야 한다"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상급심인 둥잉시 중급인민법원에서도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의 패소 판결에 김씨의 아내 강씨는 남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 '이상한 판결'이라며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강씨는 "해외 출장 간 남편이 영영 돌아오지 못한 지 3년이 다 지나도록 회사는 사건 수습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은 고사하고 책임을 회피했고, 법원은 원고의 입증 책임을 들어 원고 패소 판결을 했다"며 "법 위에 생명 있지 생명 위에 법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강씨는 "아빠는 열심히 일하다 악 소리도 못하고 기계에 깔려 이별 예고도 없이 하늘나라에 갔지만, 내 딸은 사람 하나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다"고 호소했다.
/손성배·이시은기자 s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