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인생은 '그래서 바위가 깨지겠나'라고 비웃는 세간의 편견을 보란 듯이 부숴버린 '계란'과 같다. 온몸으로 가난을 버틴 소년공에서 인권 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거칠게 싸워 온 자연인 이재명의 인생이, 사회의 민감한 문제를 정면에 끄집어내 논란을 자초하면서도 끝내 돌파해내고 마는 정치인 이재명의 인생이 그렇다. 깨지고 또 깨져도 끊임없이 몸을 던지는 인생역정을 거치며 가난을 가장 큰 정치적 자산으로, 저돌성을 이재명식 정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20대 대통령선거, 집권여당의 최종 대선후보로 우뚝 섰다.
소년 이재명은 '가난'을 몸으로 겪으며 성장했다. 그가 '흙수저'로 자라난 배경은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억강부약'(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줌)의 배경이 됐고 나아가 이재명 정치의 핵심가치인 '공정'의 기반이 됐다.
1963년(호적상 1964년생)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난 그는 5남2녀 중 다섯째로 자랐다. 초등학교를 마친 그는 성남 상대원동으로 상경했다.
그의 유년 시절은 '소년공'이란 단어로 압축된다. 아버지는 상대원 시장 청소부, 어머니와 여동생은 시장 화장실에서 이용료를 받고, 본인은 공장에 취직하며 어렵게 생활했다.
나이가 어려 취직이 불가능했던 소년 이재명은 다른 이의 신분을 빌려 여러 공장을 전전했다. 그 와중에 공장에서 사고를 겪었다. 손가락에 고무조각이 박혔고, 프레스기에 팔이 눌려 '차렷자세'를 취할 수 없게 됐다.
제때 치료받지 못해 멋대로 팔이 비틀어졌다. 비틀어진 팔을 숨기려 사계절 내내 긴 소매만을 고집했다. 가난 때문에 생긴 장애로 병역은 면제됐지만, 통증이 심해 공장일을 할 수 없게 됐다. 대신 그 시간, 그는 검정고시 공부에 매진했다.
1년 3개월 만에 중고등 검정고시와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한 그에게, 전두환 정권이 단행한 교육개혁조치가 기회로 다가왔다. 입시를 불과 몇 달 앞두고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학력고사만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과외가 금지되면서 장학금 제도가 대폭 늘어난 것이다.
학력고사에서 고득점을 얻은 소년 이재명은 전액 장학금을 제공하는 중앙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법대 4년을 장학생으로 졸업한 그는 1986년 28회 사법시험을 통과했다.
1986년 11월 3일 경인일보 기사에는 합격의 부푼 꿈을 안고 있던 청년 이재명의 이야기가 담겼다.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3세 때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한 李씨는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밤잠을 미뤄 가며 공부, 78년과 80년에 중학교와 고교졸업자격 검정고시에 각각 합격했다. 중앙대 법대 재학 때에도 4년 동안 줄곧 장학생으로 지낸 李씨는 대학교를 졸업한 올해 첫 도전에 영광을 안았다'
청년 이재명은 변호사로서 포부를 묻는 당시 인터뷰에 "앞으로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억울한 사람을 위해 일하겠다"고 밝혔다.
가난을 딛고 변호사가 된 이재명은 성남에서 노동 운동에 얽힌 시국사건이나 인권 사건의 변호를 맡으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활동을 했다. 지역 토착 비리 등을 파헤치며 왕성히 활동하던 변호사 이재명은 성남시의료원 설립 문제를 다루며 정치인으로 변모한다.
2004년 성남 구시가지의 대형병원이 문을 닫으며 공공의료원 설립 요구가 높아지자, 변호사 이재명은 시민 2만 명의 동의를 얻어 공공의료원 설립 주민발의 조례를 만들었다.
하지만 해당 조례가 시의회로부터 날치기를 당하면서, 그는 직접 정치에 뛰어들겠다 마음먹었다. 시장이 돼 직접 시립의료원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이재명의 첫 도전은 실패였다. 2006년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성남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했고, 이어 펼쳐진 18대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전했으나 연이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두 차례의 실패에도 낙담하지 않았던 그는, 2010년 성남시장 선거에서 드디어 첫 승리를 거머줬다.
"우리는 변화의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변화의 원동력은 시민 여러분입니다."
2010년 7월 성남시장이 된 정치인 이재명은 취임 직후부터 기존 정치의 결을 따르지 않았다. '호화' 논란을 빚던 전직 시장의 집무실을 북카페로 내놓았고, 취임 첫 기자회견에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당시 성남시 재정난으로 LH·국토부 등에 내야 할 판교신도시 조성사업비 5천200억원을 단기간에 갚을 수 없다는 것이 그 배경이었다. 이는 국토부와의 진실공방으로까지 이어졌는데, 기초자치단체장과 중앙정부의 이례적인 싸움은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행보는 늘 남달랐다. SNS로 시민을 향해 거리낌 없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것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두루뭉술하게 좋은 말로 포장하는 정치전형에 지쳤던 이들에겐 색다르게 다가왔다. "돈 봉투를 들고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유로 시장실엔 CCTV를 설치하기도 했다.
2014년 성남시장 재선에 성공한 이재명은 박근혜 정부와 날을 세우며 '사이다'라는 별명을 얻었고 전국구 정치인으로 국민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2016년 말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발언하며 분노한 국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촛불혁명이 한창이던 당시 선두에 서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고 두터워진 지지층을 기반으로 이듬해인 2017년 초 민주당 대선 경선에 참여했다. 득표율은 3위에 그쳤지만 차기 국가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굳혔다.
대선 경선에서 떨어졌지만 전국구 정치인이 된 이재명은 차기 서울시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거론됐다. 대선을 향한 일반적인 정치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는 경기도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지방선거에서 진보진영이 경기도지사를 탈환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는데, 성남시장에서 출발한 정치인 이재명이 정치적 토양을 '경기도'에 뿌리내리고자 한 선택으로 해석됐다. 이는 경기도 경선에서 압승을 거둬 제 20대 대통령 선거 더불어민주당 최종 대선후보로 낙점받는 데 성공하면서 그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경기도지사로 일한 이재명은 논란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부딪힌 승부사로서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개인사적 논란과 그로 인해 이어진 송사로 정치인 이재명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다. 논란이 일수록 정치인 이재명은 경기도지사로서 역할에 더욱 집중했고 경기도정에 새로운 정책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의료계의 강력한 반발에도 '수술실 CCTV 설치'를 고수하며 경기도의료원 등에 수술실 CCTV를 설치했고 결국 국회에서 '수술실 CCTV 설치'를 담은 의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특히 도내 계곡에서 불법 영업 중인 식당업주들과 직접 만나 계곡 정비사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은 유튜브 등 SNS를 통해 널리 퍼져 물러서지 않는 정치인 이재명을 각인시켰다. 그 결과로 계곡·하천 불법 시설물 99.7%가 완전히 철거됐다.
현장행정 뿐 아니라 '기본시리즈'를 통해 이재명식 공정정치의 시동을 걸었다. 경기도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차별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에서 출발한 기본시리즈는 코로나19 위기를 겪으며 전국적 이슈로 떠올랐다. 특히 '경제적 기본권'을 바탕으로 한 경제정책임을 강조하며 모든 도민에게 소멸성 지역화폐를 지급하는 재난기본소득을 선보였고 이어 만24세 청년에 분기별 25만원을 제공하는 청년기본소득, 매월 5만원씩 지급하는 농민기본소득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한걸음 더 나아간 이재명 지사는 LH 투기사태 등으로 부동산 문제가 세간에 논란을 일으킨 시점에서 '기본주택'을 꺼내 들었다. 무주택자에게 아무런 자격조건 없이 적정 임대료로 30년 이상 안정적인 거주 공간을 공급하는 것인데, 현재 시범사업 추진을 위해 사업부지를 모색하는 한편 도내 3기 신도시 지역 주택공급 물량의 절반 이상을 공급할 수 있도록 중앙정부와 협의 중에 있다. 더불어 최근엔 누구나 일정 소액을 적정 저리로 장기간 이용할 수 있는 금융서비스인 '기본금융'을 선보였고 지난달 26일 '경기도 청년 기본금융 지원에 관한 조례 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경기도발 기본시리즈는 향후 정치인 이재명의 대선 결과에 따라 국가적 정책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정치를 시작한 지 20여년 만이다. 이제 대한민국 정치의 가장 큰 무대에 섰다. 이재명의 인생은 지금 가장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