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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 인천본사 디지털취재팀장
지난 주부터 회사 인근 단골 커피숍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주기 시작했다. 연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정말 시간이 쏜살처럼 흘렀다.

작년 이맘때쯤, 새해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못했던 둘레길 걷기를 다시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신접종이 시작되면서 단계적이라도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4단계 방역 지침이 내려지면서 사라졌다. 추석이 지나서야 2차 백신을 맞고 나니 그동안 밀려있던 일들이 한꺼번에 몰렸다. 둘레길 걷기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인근 커피숍에서 캐럴을 틀어주기 시작했다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아… 시간은 쏜살 같다

 

걷기에 대한 관심은 10여 년 전쯤 우연히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갖게 됐다. 그때만 해도 국내외 둘레길과 순례길을 다녀온 이들이 기행문 형식의 책을 쓰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걷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싶어 관련 책들을 뒤적이고 있을 때 만난 글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중 한 대목이다. "냉혹한 현실에 매번 울 뻔했고 근육과 허파는 전력을 다해야 했다. 언제나 내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야 PCT는 내리막길을 보여주곤 했다. (중략) 내리막길은 또 어떤가. 잠깐은 천국 같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그렇게 내려가다 보면 이번에는 그 내리막길이 엄청난 형벌처럼 느껴지고 급기야 지쳐버려서 다시 오르막길이 나오길 기도했다." 이 글을 읽고 내가 살고 있던 삶과 누군가 걸었던 긴 길의 여정이 정말 많이 닮았다는 것에 충격과 위안을 받았다.

화자(話者)인 셰릴 스트레이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멕시코 국경에서 시작해 캐나다 국경 너머까지 아홉 개의 산맥을 따라 펼쳐지는 4천285㎞의 도보 여행길인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the Pacific Crest Trail)을 걸은 경험을 쓴 '와일드(Wild)'의 저자다. 무기력과 상실감에 빠져 있던 20대 후반의 여성이 자신을 찾기 위해 4천여㎞를 혼자 걸은 이야기는 리즈 위더스푼이 주인공을 맡아 책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다.

그렇게 책으로 걷기를 간접체험만 하다 한번 도전해보자는 마음에 후배와 나흘 동안 강화 둘레길을 걸었다. 첫날 오후에 도착한 초지진에서 둘레길 이정표를 따라 걸었다. 당시만 해도 이정표 정비가 미흡해 길이 자주 끊겼다. 처음 나선 길이다 보니 코스를 파악 못 해 밤늦게 숙소를 잡았다. 둘째 날 오후쯤 되니 슬슬 발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셋째 날에는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심해진 발목의 통증을 참고 걸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첫날 빼고 대략 20㎞씩 하루 4~5시간 정도 걸었던 것 같다.

둘레길에 나선 첫날에는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걸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대화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발목 통증으로 걷는 속도는 점점 더 느려졌다. 높지 않은 오르막도 가다 쉬기를 반복했다. 생각할 시간도 주변 경치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걷기만 했다. 그날 목표로 정한 곳까지 빨리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터벅터벅 걷다 보면 발목, 무릎까지 오는 충격으로 통증이 심해진다. 흙길이 아닌 아스팔트 길에서는 발목으로 전해오는 충격이 더 크다. 엎친 데 덮친다고 긴 아스팔트 내리막길이라도 만나면 최악이다. 그런데도 가끔 후배를 만나면 "힘들었어도 강화도 둘레길을 걸었을 때가 좋았다"는 얘기를 나눈다. 다시 한 번 걷자고 몇 번 약속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몇 년을 훌쩍 넘겼다.

강화에 이어 며칠 전 제주둘레길 걸을 기회
마스크 벗고 맑은공기를 즐길수 있어 '감사'


며칠 전 나흘간 제주 둘레길을 걸을 기회가 생겼다. 첫날은 숙소에서 쉬고, 둘째 날 둘레길에 도착했다. 오르막 첫 계단에 발을 올리자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서너 번 제주를 찾았지만 그렇게 거세게 부는 바람은 처음이었다. 어쩔 수 없이 차를 이용해 풍광 좋은 곳을 돌아다니다 비가 그치면 짧게 둘러보는 것으로 걷기를 대신했다. 마지막 날에는 다행히 날이 좋아 함덕에서 성산으로 넘어가는 오름의 억새밭 사잇길에서 아쉬움을 달랬다. 인적 없는 억새밭에서 마스크를 벗고 깊게 숨을 들여 마시다 갑자기 울컥해졌다. 맑은 공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비와 바람 사이에도 감사할 일은 있다. 새해에는 마스크를 벗는 것보다 더 값진 일로 감사한 일들이 많았으면 한다.

/이진호 인천본사 디지털취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