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장비업체 A사는 금속 등 주요 원자재 가격이 지난해 대비 35% 이상 올라 부담이 크지만 원청 기업에 단가를 조정해달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있다. 괜히 얘기를 잘못 꺼냈다 거래가 끊기거나 물량이 줄어들까 속만 태울 뿐이다.

반도체 부품을 제조하는 B사도 계약 전 원청에 관련 기술을 브리핑했는데 그 자료가 다른 경쟁 업체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됐다.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됐지만 소송은 포기했다. 괜히 평판이 나빠져 일감이 줄어들까 걱정이 앞서서다.

반도체 산업이 경기도내 주력 산업으로 거듭났지만, 정작 반도체 부품·장비 관련 중소기업들의 사정은 녹록지 않다.  


하도급 700개사 대상 설문·인터뷰
단가·지연 등 대금문제 고충 가장 커
계약前 자료요청 '기술 유출' 위험도


경기도가 지난해 6~12월까지 도내 반도체 산업 부품·장비 하도급 업체 700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심층 인터뷰(기업인 50명 대상)를 진행한 결과, 37%는 낮은 단가 책정, 대금 지급 지연 등 불공정 거래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금 문제(33.1%)로 겪는 고충이 가장 큰 것으로 조사됐다. 단가를 통상 가격보다 낮게 책정한 경우가 14.6%, 대금 지급을 늦게 하는 경우가 13.9%, 원재료 가격이 변동됐지만 대금은 조정하지 않아 부담을 떠안는 경우가 11.7%, 설계가 변경돼 비용이 더 발생하지만 대금은 조정하지 않은 경우가 8.1%였다.

다수는 원청에 말을 꺼냈다 거래가 끊길까 걱정해 대금 조정을 요청하지 않았다. 대금을 조정해달라고 한 기업은 8.6%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조정이 성립된 경우는 60%였다.

또 기술 자료를 보유한 업체 290개사 중 30%가 원청으로부터 자료 제공을 요구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기업 중 절반 이상인 52.9%는 하도급 계약 전에 자료를 요청받았다고 했다. 기술 유출 위험에 내몰려있는 것이다.

이런 설문 조사 결과는 기업인 50명을 대상으로 한 심층 인터뷰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이들 중 절반은 원자재 가격 변동에 따른 단가 미조정(50%), 낮은 계약 금액(18.7%), 기술 유용·탈취(18.7%)를 어려운 점으로 거론했다.

도는 이번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도급 대금 조정 제도 활성화를 위한 연구 용역을 추진할 계획이다. 또 경기도 자율분쟁조정협의회를 통해 하도급 업체에 대한 분쟁 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이와 함께 도내 하도급 업체의 권리를 보호하고 각종 불공정 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경기도의 조사 권한 부여 등도 정부에 건의한다는 방침이다.

김지예 경기도 공정국장은 "전국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업체 중 64%가 경기도에 소재해있을 정도로 반도체는 경기도 경제의 핵심 산업이지만, 정작 중소업체들은 각종 불공정 상황에 내몰려있다"며 "반도체 소·부·장이 발전하려면 관련 업체들의 자생력이 강화돼야 한다. 앞으로도 다양한 지원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