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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재 인천본사 사회교육부장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을 때 인천 옹진군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남북 간 교전이 벌어졌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에서 섬광이 번쩍이며 우리 해군 고속정에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선체 곳곳에서 총알 파편이 튀고 불길이 치솟았다. 갑판 위에는 시뻘건 핏물이 흘렀다. 2002년 6월29일 발발한 '제2연평해전'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 간의 첫 '서해교전'인 '제1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만이었다.

올해는 제2연평해전 20주년이 되는 해다. 제2연평해전은 NLL 해상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퇴각을 요구하는 우리 해군 참수리 357호를 향해 기습적으로 함포사격을 가하면서 시작된 교전이다. 당시 우리 해군 6명(고(故) 윤영하 소령·한상국 중사·조천형 중사·황도현 중사·서후원 중사·박동혁 병장)이 전사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우리 해군 장병들의 사활을 건 대응 사격에 북한 경비정은 반파된 채 퇴각했다. 


연평해전·천안함 피격… 北 잇단 도발
군인 전사·연평도 사건에선 민간인도 사망

 

기자는 제2연평해전의 한 참전 용사를 수소문해 만난 적이 있다. 한국전쟁 이래 북한군이 쏜 포탄이 대한민국의 영토에 처음 떨어진 '인천 연평도 포격전'(2010년 11월23일)을 겪고 난 이듬해의 어느 날이었다. 30대 초반 직장인이었던 그는 10여 년 전의 교전 상황을 또렷이 기억했다. 참수리 357호 K-2 소총수였던 그는 북한군이 쏜 총탄에 맞아 큰 부상을 당했다. 참혹했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던 그는 인터뷰 중 갑자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렵게 안정을 되찾은 그는 "예전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몸에 신호가 온다"며 "지난해(2010년)에 그 소식(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을 접했을 때에도 많이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전장(戰場)의 한복판에서 그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꼈을 극한의 공포감을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몸과 마음에 너무나도 깊게 파인 그의 상처는 결코 세월이 약이 되지 못했다.

서해교전은 제2연평해전 발생 7년 뒤인 2009년 11월10일 인천 옹진군 대청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대청해전'으로 이어진다. 또 제1연평해전에 참전했던 우리 해군 초계함인 천안함이 2010년 3월26일 인천 옹진군 백령도 앞바다에서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에 두 동강이 나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하고 구조 작업 중 1명이 순직하는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1월23일에는 북한군이 황해남도 옹진반도 개머리 진지에서 인천 옹진군 연평도에 방사포 등을 기습적으로 발사해 해병대 연평부대가 K-9 자주포로 즉각 대응한 '연평도 포격전'이 벌어졌다. 평온하던 연평도 섬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민간인을 포함한 총 4명(민간인: 고(故) 김치백·배복철, 군인: 고(故) 서정우 하사·문광욱 일병)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불과 며칠 전에는 서해상 방사포 쏘기도
역설적이게 인천서 '평화 실마리' 고민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 순방을 마친 직후 북한은 보란 듯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무력 도발을 감행했다. 불과 며칠 전에는 서해 상에 방사포를 쏘기도 했다.

남북 관계는 물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 정세까지 급격히 얼어붙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新) 냉전 구도가 짙어지고 있다. 중국의 경제 보복 가능성이나 일본의 노골적인 우경화 행보 등도 심히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NLL을 둘러싼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끊이지 않았던 최북단 인천 서해 5도 해역은 '분쟁의 바다', '한반도의 화약고'로 세계가 주목해 왔다. 전쟁과 평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인천에서 한반도 평화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세계 속 인천'의 역할을 다시금 고민해 볼 시점이다.

/임승재 인천본사 사회교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