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식(91)전 경인일보 편집국장1
이창식 前 경인일보 편집국장. /경인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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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평양에서 태어나 일제 치하와 광복을 모두 겪고 한국전쟁 때 월남해 인천과 수원에서 기자로 산 이창식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의 육성으로 1940년대 광복을 전후한 한국 상황을 들여다 본다. 기사는 이 전 국장의 구술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1930년생인 나는 태평양전쟁(일제는 대동아전쟁이라고 지칭)이 발발한 1941년 평양 신리에 살면서 평양 율리에 있는 평양사범학교 부속소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1941년 8월 대동아전쟁 전조증상을 느꼈다. 전쟁을 치르려다보니 전쟁 물자 확보가 관권이라 대개 집에서 많이 썼던 놋그릇을 빼앗아 갔다. 숟가락와 젓가락도 놋으로 썼는데 이런 것까지 다 빼앗아 갔다. 심지어 집에서 쓰던 유기로 만든 요강도 가져갈 정도였는데 탄피를 만든다는 이유였다.

같은 해 12월 일제의 진주만 폭격으로 대동아전쟁이 발발했다. 아버지가 포목상을 하셨는데 농산물뿐 아니라 포목도 통제 물자에 포함됐다. 솜으로 만든 광목천을 썼는데 통제령이 내리면서 마음대로 팔지 못했다. 장사하는 사람은 이윤이 최대 목적인데 이게 안 되니 살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소위 암거래라는 것을 그때 했다. 집에 있으면 해지고 어둑어둑해질 때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에게 몇 필 쌓아둔 옷감을 전달해주고 돈을 받으셨다.

그러다 일제 단속에 적발돼 그 길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둘이서 만주로 도망갔고, 나를 포함해 형제 셋만 덩그러니 남았다. 시집 가지 않은 어머니 동생, 이모가 우리를 돌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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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식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이 한국전쟁 당시의 자신 사진을 보여주며 국민방위군 사건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다. /경인일보DB
 

자연히 배곯는 일이 많았고, 일제가 배급한 '면미'를 주로 먹었다. 소면을 좀 굵게 만들면 쌀처럼 보이는데 그걸 면미라고 했다. 그걸 얼마 없는 밥에 얹어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그걸로도 모자랐다. 콩에서 기름 짜내고 남은 찌꺼기로 대개 가축 사료로 쓰이는 '대두박'을 가져다 면미랑 섞어 먹었다.

질도 안 좋고 금방 상하는 대두박을 섞으니 십중팔구 설사하거나 배가 부글부글 끓었다. 가축사료로나 썼던 걸 인간에게 배급하니 오죽했겠나. 이모가 쌀을 배급받으면 며칠씩 그걸 나눠 먹었다.

김치밥을 자주 먹었는데 김치를 꺼내 총총 썰고 그걸 쌀과 섞어 밥을 지으면 그게 김치밥이다. 많이 먹던 향토음식 중 하나인데 이건 통상의 김치밥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쌀은 거의 없고 김치만 가득 넣어서 그저 배 채우기 수준이었다.

전쟁 물자 쓰려 유기 요강까지 착취
가축사료 '대두박' 배급 허기 채워
'약탈 고무' 만든 공 아이들에 선물
수학여행은 경성으로 기차타고 가
 

1942년에는 구정이 없어졌다. 오랜 시간 지켜온 관습, 명절이니까 바로 없애지는 못하고 숨어서 명절을 지내는 경우도 있었는데 종종 들키는 경우도 있었다.

42년에는 쌀 뿐 아니라 육류도 배급제로 바뀌었다. 윤번제라고 해서 동네를 돌아가며 고기를 돈을 받고 배급했다. 고기 먹기 어려운 시기였는데 구하기도 어려우니 돈 있는 집안만 더 고기를 먹고 그렇지 못한 집안은 엄두도 못냈다.

학생들도 근로봉사라는 것을 했다. 오전 수업 마치면 오후에 근로봉사를 하는데 그때 평양 비행장 확장공사에 동원됐다. 자갈 운반도 하고 갖가지 심부름을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잡초도 제거했다.

전국 모든 학교에서 근로봉사를 했다. 뒷산에 올라 솔방울도 땄다. 솔방울을 따 착유하면 기름이 나온다. 그걸 아마 군용으로 사용했지 싶다. 키가 작으니까 손이 닿는 범위에서 솔방울을 땄다. 어떨 땐 떨어지라고 나무도 털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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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식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이 한국전쟁 당시의 자신 사진을 보여주며 국민방위군 사건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다. /경인일보DB

당시에 일제 사람들이 목탄차를 타고 다니는 게 신기했다. 차에 보일러 형식의 기구를 달아서 엔진을 돌렸는데 숯을 태워 물을 끓여서 연료로 돌아가게끔 했던 것 같다.

지금도 악명 높은 징병제, 학도병제가 1943년 실시됐다. 당시 나는 철부지 어린 아이였지만 많이 끌려갔던 것 만큼은 기억난다. 당시 학교에 가니 하얗고 이쁘장한 고무공을 나눠줬다.

뒤늦게 알고 보니 고무나무가 자라는 말레이시아에서 온 것이었다. 대동아전쟁을 하며 일제가 말레이시아까지 가니까 고무 생산국에서 약탈한 것이다. 식민지 아이들에게 선물로 나눠줬는데 선물을 빙자한 약탈품이었다. 어린 마음에 기분이 좋았는데, 돌아보면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소학교 수학여행은 경성(서울)으로 갔다. 평양에서 기차 쯔바메(つばめ·제비)호를 타고 경성까지 가는데 8시간이 걸렸다. 군수물자를 실은 열차가 우선이니 열차들이 다 지나가길 기다리고 기다리기를 반복하니 오래 걸린 것이다. 기차들은 물자를 싣고 국경으로 갔다.

경성역은 평양역보다 넓거나 놀라운 모습은 아니었다. 큰 차이가 있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경성에서 하룻밤 자고 인천 월미도에 갔는데 거기서 처음 바다를 봤다. 광활한 바다를 보니 신비롭고 대단했다. 그때는 내가 인천에 다시 올거라곤, 인천에 와서 신문기자가 될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훗날 이창식 전 경인일보 국장은 경인일보 전신인 인천신문 기자로 인천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관청 일요휴무제·석간신문 없애
1944년 여자 정신대 근무령 생겨
일왕 '해방 승인' 라디오로 알아

전쟁 후반기 일제가 미쳐가기 시작했다. 관청에 일요휴무제를 없앴고 석간신문도 폐간했다. 1944년 5월 여자 정신대 근무령이 생긴다.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이다. 지금도 해결이 안 되고 있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보면 벌써 몇 년째 마무리도 못 짓고 양국이 대립만 하는데서 정치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해방소식은 천황(일왕)이 라디오 방송으로 해방을 승인한다는 내용을 음성으로 말하며 알았다. 음성을 못 들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들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 만세를 외치면서 해방이 됐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고 숨겨뒀던 태극기를 꺼내 만세를 외쳤다.

해방이 되니 만주에서 부모님이 돌아왔다. 이미 집안은 풍비박산 난 상황이었다. 만주에서 지내시며 평양 집을 담보로 써 생활비용을 보전하셨던 것 같다.

해방의 기쁨을 느낄 새 없이 소련군이 평양에 들어왔다. 약탈을 일삼았다. '다와이'(다와이 쩨무네·'달라'는 뜻의 러시아어)했는데 시계, 반지, 목걸이, 귀걸이 할 거 없이 여하튼 장신구라고 할 만한 것들은 보이는 대로 모조리 빼앗았다. 해방군이 아니라 약탈군이었다.

해방이 기쁘다.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실제로 겪은 해방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아픔도 교차하는 시기였다.

구술/이창식 경인일보 前 편집국장, 정리/신지영·조수현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