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폭력 사건에서 민사소송을 통해 피고 측 행위로 인한 손해를 입증하는 데는 여러 제약이 따른다. 민사소송은 소를 제기한 원고측 신분이 노출되는 데다 자칫 손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행위로 법적 다툼의 취지가 퇴색하는 것 아니냐는 편견 때문이다.
또 민법은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 소멸 시효를 가해자가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동 성폭력 피해자 등은 통상 시간이 흐른 뒤 범죄를 제대로 인지하고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피해를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다.
법원의 그간 판단은 성범죄 피해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는 여성인권 활동가 출신 김재희 변호사가 '체육계 미투 1호' 사건의 민사소송을 대리한 이유이기도 했다.
김 변호사는 성폭력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는 범죄로 인한 후유증 진단 시점을 기준으로 계산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 사건은 초등학생 시절 성폭력을 당한 뒤 약 14년이 지나 가해자를 우연히 만났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 판정을 받은 한 여성의 이야기다.
3년여간 법정 다툼이 쉽지 만은 않았다. 성폭력 사건에 있어 참고할 만한 국내 판례가 없던 탓에 김 변호사는 일본의 민법까지 들여다봤다.
일본 삿포로 고등법원재판소는 이번 사건과 유사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사건 발생 20년이 지났더라도 어린 시절 성적 학대로 인한 우울증이 발병한 데 대해서는 시효가 지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김 변호사는 이 사건 피해자를 지원한 일본의 한 로스쿨 교수를 만났고 그의 의견서와 심리전문가 및 의사 등 소견을 토대로 성폭력 후유증과 이에 따른 손해를 입증할 근거를 확보했다. 성폭력으로 인한 후유증 등 피해는 예측이 불가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 주력한 것이다.
결국 대법원은 '전문가로부터 성범죄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은 때부터로 피해자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김 변호사는 "피해자분이 선례를 만들고 싶어 했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성폭력피해자지원단체, 체육계, 민법계, 젠더법학계 교수 등 많은 분들의 지원과 도움을 통해 이룬 결과다. 문제를 공론화하고 판결을 남겼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공을 인정받아 제20회 대한변호사협회 선정 우수 변호사에 이름을 올렸다. 올해 경기도에서는 유일한 우수 변호사다. 김 변호사는 "법조계가 미투에 위드유로 응답을 한 것 같다. 자부심과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