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반도체 제조 현장에서 일한다. 배관에 문제가 생겨 보수를 지시받았고, 동료와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지만 팔을 뻗어도 문제가 된 곳이 좀처럼 손에 닿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사다리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겠는걸." 동료는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쉬었다.
나는 불안했지만 발을 사다리 가장 윗부분에 디뎠다. 불안하고 겁이 났다. 그때였다. 사다리가 살짝 흔들렸고, 중심을 잃은 나는 그대로 떨어졌다. 순식간이었다. 내 눈은 어느새 천장을 향해 있었다. "여기 사람이 떨어졌어요! 도와주세요!" 엄청난 고통 속 동료의 외침이 아득히 들려왔다. 나는 괜찮은 걸까. 큰 문제는 없는 걸까.
돌연 퀴즈가 등장한다. 다음 중 사다리 안전수칙으로 옳은 것은. 1) 사다리의 수평이 맞지 않으면 아래를 대충 괴어서 안정시킨다. 2) 사다리 작업은 반드시 2인 1조로 진행해야 한다. 3) 작업해야할 곳이 손에 닿지 않으면 사다리 최상부로 올라가도 괜찮다. 손을 들어 2번을 누른다. 정답이다.
이는 삼성전자가 반도체(DS) 부문 협력사들을 위해 마련한 '환경안전 아카데미'에서 실시되는 VR(가상현실) 안전교육의 일종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8월26일 평택캠퍼스 인근에 약 5천619㎡ 규모의 환경안전 아카데미를 열었다. 앞서 2019년 조성한 기흥·화성캠퍼스 아카데미의 3.5배다. 국내 최대 규모다. 이곳에선 다양한 안전교육을 VR기기를 이용해 생생하게 받을 수 있다.
■마치 실제 사고를 겪은 듯…생생한 체험에 심장 '쿵' 내려앉아
지난 18일 환경안전 아카데미를 찾아 각종 교육 체험에 나섰다. 앞서 설명한 VR 안전교육이 과정 전반에서 매우 비중있게 실시되는 게 특징이었다.
VR기기를 착용한 채 퀴즈를 풀면서 안전수칙에 대한 교육을 받는 과정 외에도 별도의 VR체험관을 조성해 안전대 및 발판에서의 추락, 지게차 사고, 클린룸 화재 등 실제 작업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사고 상황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체험사례 모두 방심하는 순간 생명을 위협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안전벨트의 중요성을 체험해보기로 했다. VR기기를 낀 채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벨트를 차근차근 착용했다. 가방을 메듯 어깨에 벨트를 걸치고 다리 역시 벨트에 고정했다. '가상체험인데 이렇게까지 벨트를 채울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간을 들여 꼼꼼히 맸다.
VR기기 속에서 나는 반도체 제조 현장 안에 있었다.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현장 내부 모습과 같았다.
잠시 (가상현실 속) 내부를 둘러보는 새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실제로는 그다지 높이 올라가지 않았지만, 가상현실 속에선 족히 5m 이상은 올라간 것 같았다. 안전벨트를 착용한 채 높은 곳에서 작업하다가 추락하는 상황을 체험해보기 위한 것이다.
그러다 예고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자이로드롭을 타듯,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다행히 몸은 벨트에 고정돼있었다. 만약 벨트를 하지 않았다면, 혹여나 착용했다고 해도 대충 둘러매어 추락할 때 벨트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면 아찔했을 상황이었다. 가상현실이지만 그야말로 '리얼'했다.
함께 체험한 기자는 고성을 내질렀다. VR기기를 벗으니 그제서야 안도감과 함께 약간의 민망함이 몰려왔지만 벨트의 소중함은 확실히 새겼다. 아카데미 관계자는 "성인 남성들도 체험 후 다리가 풀렸다고들 얘기한다. 체험해보고 나면 각종 안전수칙이 현장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VR기기로 퀴즈 풀고 실제 경험
진짜 지게차 준비… 현실성 높여
다른 VR체험 인프라에도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묻어났다. 일례로 지게차 사고 체험의 경우 어설픈 모형이 아닌 실제 지게차를 가져다놨다. 현장에서 지게차에 받히거나 차량이 넘어지는 사고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만큼, 실제 차량을 이용해 보다 현실감 있게 체험하게 한 것이다.
진짜 같아서 사고 상황이 공포스러웠고, 그래서 경각심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VR기기를 활용한 안전 수칙 교육 역시 단순히 사고 상황을 묘사한 동영상을 시청하고 퀴즈를 푸는 게 아니라, 정말 작업 도중 사다리에서 떨어진 것 같은 아찔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현실이 아님에 감사했고, 안전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런 특성 때문에 협력사 직원들의 교육 체감도가 다른 교육을 이수할 때보다 훨씬 높다는 게 실제 교육에 참여해본 협력사 측 설명이다.
■협력사 직원들 위한 공간 곳곳 조성 "만족도 높아"
안전교육 외에 협력사 직원들이 건강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공간도 조성했다. 작업 과정에서 무거운 물체를 자주 들어 옮기다 보니 협력사 직원들 중엔 근골격계 질환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이런 점을 감안해 신체 상태와 현재 앓고 있는 질환을 확인할 수 있는 기기들을 해당 공간에 배치했다.
전문 상담사들이 처방을 내려주는 것은 물론, 작업 현장 개선과 관련한 상담이 필요한 경우엔 컨설팅을 지원하기도 한다.
여기에 코로나19 사태 등 대면교육이 불가능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비대면으로 교육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갖춘 것도 눈길을 끈다. 사내에 교육 등을 위한 공간이 부족한 협력사들을 위해 대형 강의 공간 등을 대여해주는 점도 특징이다.
교육프로그램뿐 아니라 협력사 직원들을 배려한 공간을 충분히 조성하고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점 역시 협력사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기기들 비치 직원건강 진단 가능
대면 불가 대비한 스튜디오 갖춰
지난달 해당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한양테크앤서비스 관계자는 "상당히 규모가 커서 놀랐고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특히 반도체 사업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고사례를 중심으로 현장감 넘치게 구현하다보니 직원들이 경각심이 훨씬 더 크게 생긴다고 하더라"며 "실린더 같이 무거운 것을 많이 드는 만큼 직원들이 근골격계에 부담을 느낄 여지도 큰데, 그런 직원들을 대상으로 도수치료나 재활 프로그램 등을 상담해주고 참여할 수 있게 해준 점 등도 만족스러웠다. 또 비대면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공간을 회사 내부는 물론 주변에서도 구하기 어려워 코로나19 사태로 직원 교육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아카데미가 생긴 이후 공간 대여가 가능해 그런 문제도 해소됐다"고 밝혔다.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