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일 때문에 자신이나 가족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여유를 갖고 사는 것은 근면 성실하지 않은 것처럼 여겼다.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 광산, 베트남 전장, 중동 사막까지 마다치 않고 달려가 목숨 걸고 일했다. '여유'라는 말을 사치로 느꼈던 시절이었다. 60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대다수 청소년 세대는 입시 때문에 사색할 여유가 없다.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도 마찬가지다. 어렵게 취직하더라도 익숙하지 못한 직장생활에 미생(未生)의 하루를 보낸다.
입시·취업·결혼·육아·자녀교육·노년취업…
시간에 휘둘려 정신 못차리는 쉴틈없는 삶
결혼 이후에는 육아와 자녀 교육에 매달려 정신이 없다. 조직의 중심에서 일하는 중년에는 '여유'라는 게 퇴근 후 동료들과의 하루를 마감하고 한숨 돌리는 술자리 정도였다. 은퇴를 앞둔 시점에는 자녀 결혼을 준비하고, 초로(初老)에 들어서도 '제2의 인생'에 도전하기 위한 노년 취업준비생의 삶을 되풀이한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노래 가사처럼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울어간다. 김광석이 리메이크해 인기를 끈 이 노래는 김목경이 1984년 발표한 1집 'Old Fashioned Man'에 수록한 노래이다. 김광석이 이 노래를 녹음할 당시에 '막내아들 결혼식 날…' 부분만 가면 눈물이 쏟아져 도저히 녹음할 수 없어, 술 마시고 녹음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지난 8일 저녁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월식'과 지구 그림자에 가려진 달이 다시 천왕성을 가리는 '천왕성 엄폐' 현상이 동시에 진행됐다. 한국천문연구원은 앞으로 200년 안에 한국에서 두 천문 현상을 동시에 관측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먹고 사는 일도 바쁜데 지구가 달을 가리고 달이 천왕성을 가리는 것을 보면 '사는 데 도움이 되느냐'고 하면 뭐라 할 말은 없다. 태어나서 한 번 볼까 말까 한 천문현상이지만, 안 봐도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다. 파란 하늘과 예쁜 꽃, 향기로운 차 한잔에 무관심하다면 너무 메마르게 사는 건 아닐까.
한달에 하루라도 하고 싶었던 것들 해보자
여유있는 삶은 나만의 시간 갖는것부터 시작
시간에 휘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을 활용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일에 쫓겨 정신 못 차리지만, 후자는 일과 여가를 즐기는 사람이다. 일의 효율성을 높이고 시간을 잘 관리한다면 일의 성과를 내고 여유도 즐길 수 있다. 여유 시간은 조금 불편하게 활용해 보는 것이다. 한 달에 하루라도 평소에 쉽게 하지 못했던, 하고 싶었던 일에 시간을 내보자. 산책도 하고, 먼 곳까지 걸어가 보고, 온종일 책만 읽고, 맘이 통하는 사람과 긴 시간 수다를 떨어보는 것이다. 딱히 쓸 글은 없더라도 책상 서랍에 두었던 만년필에 잉크를 넣어 좋아하는 시를 옮겨 적어보고, 옷장에 넣어둔 카메라를 꺼내 가족이나 친구들의 모습을 담아 보자. 기억이 가물거리는 오래된 영화들을 찾아보거나 턴테이블에 LP판을 걸어두고 음악을 듣는 것도 운치 있다. 천문대에서 별을 보거나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지펴보는 것도 조금 불편하더라도 유쾌한 여가가 될 수 있다.
목적을 두지 않고 과정을 즐기는 것은 시간을 기억하고 간직하는 방법 중 하나다. 한 해를 보내는 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하지 않고 살았다. 지금 우리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사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이 즐겁고 행복하지 않은데 내일은 즐겁고 행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여유 있는 삶은 잠시라도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불을 끄면 별이 보인다.
/이진호 인천본사 디지털콘텐츠부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