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전 이맘때였다. 인천 중구에서 첫째 지민이(6)와 둘째 정민이(4)를 홀로 키우던 이정미(30·이상 가명)씨를 만나 인터뷰했다. 젖을 물리지 못했던 딸아이가 첫째 지민이다. 한겨울 방바닥은 온통 냉골이었다. 허연 입김이 났다. 이씨는 남편의 행패를 견디다 못해 아이 둘을 데리고 도망치듯 이곳으로 숨어들었다고 했다. 정부 지원금조차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양육 책임이 있는 전 남편에게 수입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두 아이는 저체중과 영양실조, 빈혈, 천식 등을 앓고 있었다. 이씨도 왼쪽 얼굴에 마비가 왔다.
당시 지민이네 가족의 딱한 사연을 접한 신문 독자들의 후원이 잇따랐다. 이씨는 힘을 냈다. 직업훈련학교에서 미용기술도 배우기 시작했다. 인천의 한 미용 기업도 그를 응원했다. 벌써, 10년이 지났다. 어쩌면 이씨는 지금 어느 동네에서 꽤나 소문난 미용사가 돼 있을지 모른다. 또 여섯 살이었던 지민이는 어엿한 여고생으로 훌쩍 자랐겠다. 이제는 엄마의 든든한 큰딸이자 둘도 없는 친구가 돼 있을 것이다.
10년전 딱한 사연 인터뷰했던 지민이네 가족
어엿한 여학생 돼 엄마 친구이자 든든한 딸로
경찰관 꿈꾸던 민석이도 유도학원 소원풀어
최근 인천의 한 아동 복지단체가 보낸 메일을 받고 가장 먼저 지민이를 떠올렸다. 10년 전 매주 한 차례씩 3개월(2012년 10월~2013년 1월) 동안 이 복지단체와 함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의 사연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 인연으로 소액이나마 후원을 시작했다. 그게 10년이 됐다고 알려주는 메일이었다. '잘 자랐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느덧 어른이 된 아이들이 전국 각지의 후원자들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는 동영상이 메일에 담겨 있었다. 그렇게 당시 신문 기사들을 다시 찾아봤다.
경찰관이 꿈이라던 민석이(15·가명)도 잊을 수 없다. 가파른 산 비탈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허름한 판잣집. 민석이네 집이었다. 도심 속 외딴 섬 같았다. 내비게이션으로도 위치 검색이 안 되는 곳이었다. 저 멀리, 빌딩 숲이 우거진 송도국제도시가 한눈에 펼쳐졌다. 왠지 낯설고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큰 빚을 져 오갈 데 없던 민석이 엄마(43)는 홀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 왔다. 첫째 민석이가 일곱 살 때였다.
사춘기였던 민석이는 어려운 집안 형편을 원망했다. 비가 오면 종종 전기가 나가는 집이었다. 물탱크를 갖다놓기 전까지는 한겨울에도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물을 길어다 썼다. 민석이는 한 번도 친구들을 집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 창피해서 집에 놀러 오겠다는 친구들을 따돌리고 멀리 돌아서 집에 오곤 했다. 민석이는 말수가 점점 줄어갔다. 엄마에게 짜증 내는 일도 부쩍 늘었다. 엄마는 아이가 엇나갈까 봐 마음을 졸였다. 아빠의 빈자리가 커 보였다. 어느 날 민석이가 유도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의 이 작은 소원조차 들어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구독자 후원' 자랑스러운 버팀목 성장 기대
당시 민석이네 가족에도 후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인천의 한 경찰관은 선뜻 아이의 멘토가 돼 줬다. 소원이었던 유도 학원에도 다니게 됐다. 올해 민석이는 20대 중반의 청년이 됐겠다. 엄마의 자랑스러운 버팀목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민석이는 어릴 적 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까. 머지않아 경찰관 제복을 차려입고 엄마에게 멋지게 경례를 할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임승재 인천본사 사회교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