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주년(1월 16·17·19일자 1·3면 보도=[중처법 1년, 부재의 흔적을 좇다·(上)] 평택항 이선호씨 사망사고 그 후…)을 하루 앞둔 26일 오전 고용노동부 경기지청 앞. 산재사고 유족 백경분(61)씨는 함박눈이 쏟아지는 거리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사건이 일어난 지 4개월이 다 돼가나, 원인을 제공한 기업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는 진척이 없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북받치는 그리움과 노여움이 아직도 제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아들 김신영씨를 떠올리며 힘줘 말하는 백씨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지난해 9월 30일 화성 향남읍의 화일약품에서 발생한 아세톤 유출 유증기 폭발로 입사 2개월 차 29살이던 신영씨가 현장에서 숨졌다. 폭발 여파로 신영씨 외에도 17명의 노동자가 부상을 당하는 등 인명 피해가 났던 중대재해사건이었다.
현재 화일약품 공장장을 비롯한 사측 관계자 4명은 지난해 10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돼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앞서 화일약품은 한국안전문화진흥원의 PSM진단보고서에서 중대재해를 대비하기 위한 매뉴얼 마련과 교육훈련이 소홀해 지적받았다.
'화일약품 사고' 조사 진척 더뎌
'예방 위주' 중처법 수정안 의문
민주노총 '기소촉구' 서명부 전달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11월 고용부가 발표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본 유족들은 불안한 마음에 초조해 하고 있다. 아직 경영책임자 기소 여부나 사건 현장 안전 조치 등과 관련한 고용부 조사 결과조차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유족들은 중처법 실효성 논란이 불거진 뒤 '처벌'보다는 '예방' 위주로 법 방향을 바꾸겠다는 정부 발표에 허탈해 했다.
백씨는 "아세톤 유증기가 유출됐을 때 비상벨도 울리지 않았고, 방송 장치도 없어서 대피 명령이 아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경영의 책임 있는 자가 노동자를 보호하는 의무를 다하지 않아서 발생한 사건"이라며 "상황이 이런데 얼마 전, 거꾸로 경영책임자 처벌을 완화하겠다는 정부 발표를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고 말했다.
조사에 진척이 나지 않는 데 더해 처벌 완화 기류가 감돌자 유족들과 노동계는 이런 상황을 틈타 기업들이 책임을 지기보다는 회피에만 골몰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앞서 백씨는 "화일약품은 지난해 12월에 전 직원을 모아놓고 처벌불원서를 일괄 제출받았다고 들었다. 가해자는 잘못을 회피하고 책임을 면하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한편 이날 경기지청 앞에는 중처법 시행 1주년을 앞두고 민주노총 경기본부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 경기운동본부 등이 모여 '중대재해감축 로드맵' 수정을 요구하며 집회를 열었다. 백경분씨와 민주노총 경기본부 관계자 등은 2천481명의 서명이 담긴 '화일약품 중대재해 기소 촉구안'을 경기지청 관계자에게 전달했다.
/이시은·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