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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 인천본사 디지털콘텐츠부 국장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은 물건이 있고 새로운 것이 가치를 인정받을 때가 있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라이카 카메라, 로마의 콜로세움 등은 세계적으로 역사·기술·예술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반면 스마트 휴대전화기, 자동차, 컴퓨터 같은 제품은 최고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 가치를 인정받는다. 명품처럼 만들어진 때와 상관없이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도 있다. 롤렉스 시계, 에르메스, 샤넬, 디오르 등의 인기 제품은 리셀 플랫폼에서 발매 가격보다 비싸게 거래되기도 한다.

인류가 귀중히 여기고 사랑한 것 중에는 인문적인 요소와 장인(匠人)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감각적이고 첨단 기술이 탑재된 제품에 대한 소비시장이 커지고 있다. 트렌드를 이끄는 기업에서는 신세대 감각을 갖춘 젊은 인재를 선호한다. 언뜻 보면 트렌드 산업이 전통적 산업구조를 흩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트렌드 업계는 물론 세계적인 유력 언론사, 출판사, 다국적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직원을 채용하고 제품 생산과 마케팅에 인류학 연구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출판·언론 대중 관계 경험·지혜 쌓여있는곳
꼰대문화 보다 중요한건 '사람에 대한 이해'


20세기 초 현대적 의미의 분과학문으로 성립한 인류학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인류학은 기업의 제품 개발과 마케팅을 포함해 문화·예술 분야의 콘텐츠 개발에 활용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유력 언론은 인류학 전공자들을 주요 부서에 배치하는 추세다. 나라와 지역마다 독특한 문화와 역사, 민속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발달로 지구 어느 곳에서나 모든 나라의 언론 매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언론이 사용한 단어나 특정표현으로 인해 관련 국가나 민족의 감정을 건드려 분쟁이 일어나고, 테러가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는 인류학의 관심과 필요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코카콜라, 넷플릭스, 아마존 같은 대기업들은 인류학 연구기법을 활용해 나라와 민족 특성에 맞춘 콘텐츠와 서비스를 제공한다. 2006년 LG전자가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의 방향을 표시해 주는 나침반 휴대전화를 중동지역에 출시했다. 휴대전화 사용자들이 액세서리로 제공된 나침반을 북쪽에 맞추고 휴대전화에 자신이 위치한 도시 이름을 입력하면 메카 방향이 표시된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할 경우 세계 어디에서도 메카 방향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스마트 휴대전화기가 본격 개발되기 전에 개발된 '나침반 앱'으로 보면 된다. 당시 LG 측은 "이슬람교도는 메카의 옛 신전을 향해 하루에 다섯 번 예배해야 하는데 사막 지역에서 위치 파악이 어려워서 이 제품을 개발했다"고 했다. 인류학 관점에서 출발해 제품 생산으로 이어진 사례다.

노련한 선배 책상엔 열정적 작업물 놓여있어
노하우 갖춘 울타리 돼주는 조직은 탄탄하다


인문·인류학이 성립되기 이전에도 인류는 교역, 전쟁, 포교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풍속과 생활방식이 다른 민족이나 국가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그중에서도 출판계와 언론은 대중과 관계를 맺는 방법에서 학문적 성과에 견줄만한 경험과 지혜가 쌓여 있는 곳이다. 노련한 작가의 작품을 출간하는 데 초짜 편집자들이 '감 놔라 배 놔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경우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편집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갓 입사한 초년 기자만으로 신문을 제작할 수 없다. 부조리를 고발하고, 정권을 견제하는 기사는 교육받은 기자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 하지만 사회 현안을 통찰하고, 다양한 의견을 취합해 대안을 제시하는 기사는 주로 베테랑 선임 기자들이 담당한다.

꼰대들만 남아 이래라저래라 하는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그렇다고 젊은 인재만 모아 조직을 운영한다고 해서 효율이 넘치는 것도 아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21세기에 인류학이 제시하는 키워드는 '사람에 대한 이해'다. 노련한 선배의 책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물창고와 같다. 그곳에는 열정적으로 이뤄낸 작업물이 있고, 오랜 시간 터득한 지혜가 쌓여있다. 논설실 선배의 글은 기자를 겸손하게 만든다. 배움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또다시 책을 들게 한다. 경험과 실력을 갖춘 선배들이 울타리가 돼주는 조직은 든든하고 탄탄하다.

/이진호 인천본사 디지털콘텐츠부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