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일제강점기 국내 강제동원 피해의 생생한 현장이 여전히 남아있다.
정부가 6일 국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 확정 판결을 일본 측이 참여하지 않는 '제3자 변제' 방식으로 매듭짓기로 하면서, 정부 차원에서 국내 강제동원 피해 문제는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반대급부로 인천의 국내 강제동원 역사 현장이 재조명될 전망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19년 펴낸 구술사료집 '일제의 강제동원과 인천육군조병창 사람들'을 보면 일제강점기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력은 연인원 780만명 규모로 이 가운데 650만명이 국내로 동원됐다. 국내 강제동원이 월등히 많은 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조선을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캠프 마켓 전신 1만2584명이상 동원
배고픔·잦은 폭행에 탈출 시도까지
인천 부평 미군기지 '캠프 마켓'이 현존하는 국내 강제동원의 대표적 현장이다. 캠프 마켓 전신은 일본군 군수기지 '조병창'으로 1939년 현재 터에 조성돼 1941년 문을 열었다.
국사편찬위 구술사료집에 따르면 인천 조병창에 동원된 명단 1만2천584명이 확인되는데, 지역별로 명단이 통째로 빠진 경우도 있어 실제론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병창에 강제동원된 이들은 소청, 총검, 탄환, 포탄, 군도, 차량 등 무기 제조 공장에서 일했다.
조병창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삶은 어땠을까. 국사편찬위 구술사료집에 증언한 12명 대부분은 배고픔에 시달렸고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생산 책임량을 채우지 못하면 "사람을 두들겨 잡다시피"했고,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강제동원 증거이기도 하다. 부평구 부평공원에 2017년 8월 세워진 '징용 노동자상'은 용산 등 다른 지역 징용 노동자상과 달리 국외 강제동원 피해자가 아닌 실제 조병창 노동자를 모델로 삼았다. 조병창 건물들은 해방 후 미군기지로 쓰이면서 현재까지도 상당수 건재하다.
일제강점기 조성된 인천 중구·동구 공장지대는 중일전쟁 전후 군수공장 전환으로 강제동원 현장이 됐다. 동일방직과 일진전기 공장, 그 주변 노동자 사택들이 당시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흔적이다.
특히 동일방직(한국 기업) 전신인 동양방적(일본 기업)은 다수의 아동을 강제동원했다. 이상의 인천대 기초교육원 교수 논문 '구술로 보는 일제의 강제동원과 동양방적 사람들'이 지난해 8월 '인천학연구' 제37호에 실렸는데, 구술에 참여한 여성 3명은 모두 1943년 만 11세에 다른 지역에서 동양방적 공장으로 강제동원됐다.
중·동구 공장지대 노동자 사택들도
동양방적 아동 동원 ILO 협약 위반
피해배상 논란 커지며 '장소' 부각
이 논문은 당시 일본이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가입 등으로 본토에선 아동 노동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동양방적의 아동 동원은 ILO 협약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동양방적이 아동 노동력을 동원한 건 공정에서 '작은 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수 전문가는 정부의 강제동원 피해 배상 확정 판결 해법에 대한 논란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역사를 환기할 장소로 조병창 등 인천의 중요성이 부각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천 근현대사 한 페이지에 강제동원 현장을 주요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