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젓하고 꿈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27일 안산 선부동의 한 빌라에서 화재로 숨진 나이지리아 국적 4남매 가운데 첫째 A(11)양에 대해 그를 가르치던 대안학교 교사이자 이주민시민연대 최혁수(53)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최 대표는 "수업에도 곧잘 참여하며, 친구들을 잘 챙기는 아이"로 A양을 기억했다. 그러면서 "5남매의 맏이로서 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앞서 있는, 늘 모범을 보이는 친구"라고 떠올렸다.
A양은 이 대안학교를 가장 오래 다녔던 아이라고 했다. 최 대표가 A양과 인연을 맺은 건 지난 2013년의 일이다. 그가 지역의 구세군 사관을 맡아 '자선냄비 캠페인'을 벌일 때 둘은 처음 만났다. 지금의 대안학교 교사를 하기 전, A양의 어머니가 "집안이 어려우니 아이의 교육을 좀 맡아달라"는 요청을 쉽게 뿌리칠 수 없었다. 최 대표는 "2017년쯤 사회적협동조합 형태의 시민연대를 만들며 대안학교를 연 것인데, 그전부터 (A양과) 함께 했으니 햇수로 8년쯤은 만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갑작스러운 참사 소식을 전해 듣고 슬픔에 잠겨 이날 오전, 오후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평소처럼 학교에 오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목소리를 낸 것은 "참사를 당한 가족을 두고 여러 이야기를 하며 '화목하지 않았던 이주민'이라는 온갖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번은 코로나19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 최 대표는 A양 집에 방문한 적이 있다. A양 아버지를 제외한 다섯 식구가 모두 코로나19에 감염돼 생계 용품이 필요한 때였다. 창문 너머로 옹기종기 어울려 있던 가족의 모습을 아직 잊지 못한다. 최 대표는 "걱정하는 마음에서 생필품을 챙겨줬는데, 밝은 모습을 보고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갔던 날"이라고 했다.
A양뿐 아니라, 이번 참사에서 화마를 피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 셋째 B(6)군도 이 학교에 다녔다. 여느 아이들처럼 주변 일들에 관심이 많았으며, 때론 주위가 산만할 만큼 집중을 못 하는 성미를 가졌다고 했다. 그러다 이내 학교 수업에 적응하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다고 최 대표는 말했다. "만난 지 3년정도 된 이제야 밝게 웃으며 인사도 나누고 그랬는데, 이렇게 되다니 안타까워서요 참…"
4남매 중 한국의 표준적인 '초등학교'에 다닌 아이는 없었다. 그렇지만 남매 둘은 대안학교에서 각각 저마다의 나이대 수업에 참여하며 꿈을 그렸다. 이주민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이곳은 그들이 잠시나마 '다른 시선'에서 자유로이 나래를 펼쳤을 공간이었을 것이다. 최 대표는 해사한 미소로 매일같이 반겨주던 두 남매를 다시 떠올렸다.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
27일 안산 선부동의 한 빌라에서 화재로 숨진 나이지리아 국적 4남매 가운데 첫째 A(11)양에 대해 그를 가르치던 대안학교 교사이자 이주민시민연대 최혁수(53)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최 대표는 "수업에도 곧잘 참여하며, 친구들을 잘 챙기는 아이"로 A양을 기억했다. 그러면서 "5남매의 맏이로서 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앞서 있는, 늘 모범을 보이는 친구"라고 떠올렸다.
A양은 이 대안학교를 가장 오래 다녔던 아이라고 했다. 최 대표가 A양과 인연을 맺은 건 지난 2013년의 일이다. 그가 지역의 구세군 사관을 맡아 '자선냄비 캠페인'을 벌일 때 둘은 처음 만났다. 지금의 대안학교 교사를 하기 전, A양의 어머니가 "집안이 어려우니 아이의 교육을 좀 맡아달라"는 요청을 쉽게 뿌리칠 수 없었다. 최 대표는 "2017년쯤 사회적협동조합 형태의 시민연대를 만들며 대안학교를 연 것인데, 그전부터 (A양과) 함께 했으니 햇수로 8년쯤은 만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갑작스러운 참사 소식을 전해 듣고 슬픔에 잠겨 이날 오전, 오후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평소처럼 학교에 오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목소리를 낸 것은 "참사를 당한 가족을 두고 여러 이야기를 하며 '화목하지 않았던 이주민'이라는 온갖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번은 코로나19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 최 대표는 A양 집에 방문한 적이 있다. A양 아버지를 제외한 다섯 식구가 모두 코로나19에 감염돼 생계 용품이 필요한 때였다. 창문 너머로 옹기종기 어울려 있던 가족의 모습을 아직 잊지 못한다. 최 대표는 "걱정하는 마음에서 생필품을 챙겨줬는데, 밝은 모습을 보고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갔던 날"이라고 했다.
A양뿐 아니라, 이번 참사에서 화마를 피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 셋째 B(6)군도 이 학교에 다녔다. 여느 아이들처럼 주변 일들에 관심이 많았으며, 때론 주위가 산만할 만큼 집중을 못 하는 성미를 가졌다고 했다. 그러다 이내 학교 수업에 적응하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다고 최 대표는 말했다. "만난 지 3년정도 된 이제야 밝게 웃으며 인사도 나누고 그랬는데, 이렇게 되다니 안타까워서요 참…"
4남매 중 한국의 표준적인 '초등학교'에 다닌 아이는 없었다. 그렇지만 남매 둘은 대안학교에서 각각 저마다의 나이대 수업에 참여하며 꿈을 그렸다. 이주민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이곳은 그들이 잠시나마 '다른 시선'에서 자유로이 나래를 펼쳤을 공간이었을 것이다. 최 대표는 해사한 미소로 매일같이 반겨주던 두 남매를 다시 떠올렸다.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