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풍이 몰아친 지난 11일 시흥시의 한 오피스텔 신축현장. 28년차 타워크레인 조종사 김덕현(가명·57) 씨는 이날 오전 작업에 앞서 '이 정도 바람이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지겠다'고 직감했다.
지상 약 20m 높이 조종석에 오르자 풍속계 다이얼 숫자가 초속 12~13m를 오가며 경고음(초속 10m 이상 시 작동)을 울렸다. 그는 다급히 현장 관계자에게 "작업을 미뤄야 할 것 같다"고 무전을 보냈다.
작업은 강행됐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건물 외벽에 붙일 거푸집을 올리는 날이었는데 강풍 방향대로 인양물이 대롱대롱 도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날 300㎏가량의 거푸집 하나를 옮기고 나서 2배 더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에야 작업이 '올 스톱'됐다.
김씨는 "그때라도 멈췄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외벽 난간에서 물건(거푸집)을 받는 작업자들이 크게 다칠 뻔 했다"고 아찔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시흥 공사현장 초속 13m 바람
"미뤄야 한다" 무전 요청 묵살
인양물 공중서 돌며 '위험천만'
경인지역 타워크레인 조종사들이 '원치 않는' 강풍 속 위험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조종사 안전을 위한 '작업 중지권'이 건설현장 사업주를 더 고려한 정부의 조치 탓에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 상황이어서다.
지난달 정부는 건설현장에 초속 15m 이상 강풍이 불어도 원청 사업자 허락 없이는 크레인 작업자가 조종석을 떠날 수 없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은 건설현장 '성실의무 위반 판단'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가 발생할 만큼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노동자가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는 '작업 중지권'을 규정하고 있다. 사업주도 위험 가능성 등 합리적 가능성을 인정할 경우 작업 중지로 이어질 수 있지만, 앞선 사례처럼 현장에서는 쉽게 발동되지 않는다는 게 조종사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국토교통부는 현장 작업자의 의도적인 태업 행위 등을 제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의도성'의 모호함을 강조하며, 최소한의 안전을 담보할 작업 중지권이 무색해진 현실을 지적한다.
노동자 위한 중지권 '무용지물'
사업주 허락 있어야 효력 발생
인천 송도의 아파트 신축 건설현장에서 타워크레인을 모는 박정산(가명·54)씨는 "작업 중 바람이 약하다가도 20~30m 높이에서 갑자기 돌풍이 불어닥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1층 사무실에선 크게 느끼지 못해 (작업중지)요구해도 작업을 이어가라는 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했다.
김씨가 일하는 오피스텔 현장 담당자는 "오전 크레인 작업을 시작했을 때 작업을 해도 되는 정도로 파악했다"면서도 "두 번째 (거푸집)띄웠을 때 위험함을 느껴 작업을 즉각 멈췄다"고 했다.
시흥을 관할하는 고용노동부 안산고용노동지청 관계자는 "신고가 접수되면 유선으로 지도하고 현장에 나가는데 이날 관련 민원은 없었다"며 "현장에 관리·감독을 나가지만 인력 문제도 있고 모든 현장을 지속 감독하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