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시민 5만명 운집 '직선제 개헌' 목청
당시 보도지침, 과격시위·고문축소 등 주문
인천5·3민주항쟁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 명시된 것을 계기로 37년 전의 역사를 취재하면서 전두환 정권이 각 신문사에 하달한 '보도지침'을 마주했다. 인천5·3민주항쟁 당일 보도지침은 1면 머리기사를 '한·영정상회담'으로 하고 시위 기사는 1면 사이드 톱 또는 사회면 톱 등으로 쓰게 했다. 기사 내용과 방향까지 정해줬다. 학생·노동자 시위로 쓰지 말고, '폭동에 가까운 과격시위'로 쓸 것을 주문했다. 이어지는 보도지침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경찰의 과잉 개입이 과격 데모를 유발했다는 식으로 하지 않을 것'(5월5일), '5·3시위 구속자 고문 사례를 가급적 보도하지 말 것'(6월17일) 등을 지시하며 마치 편집국장처럼 지면에 개입했다. 안타깝게도 당시 모든 언론사는 보도지침대로 따랐고, 거기에는 경인일보도 포함돼 있다. 신문으로 세상을 본 시민은 1986년 5월 3일 인천의 민주화 시위를 '5·3 소요 사태'로 기억하게 됐다. 여전히 인천에서 인천5·3민주항쟁이 아닌 5·3사태로 명명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인천5·3민주항쟁은 그 이듬해 6월 항쟁으로 가는 분기점이 됐다.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선거 직선제가 도입됐고, 보도지침은 사라졌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기 보도지침을 따르지 않거나 정권에 비판적 기사를 취재한 기자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 국군보안사령부(현 기무사) 기관원으로부터 호된 시달림을 당했다. 정권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신문사는 존재할 수조차 없던 언론 암흑기였다고 하지만 역사의 기록자로서 신문의 위상은 추락했다. 인천5·3민주항쟁의 현재적 의미는 다양한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시민으로서 정체성을 지닌 여러 계층이 단일대오를 이루지 않고도 한날한시 광장에 모였다.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직선제 개헌과 같은 공통의 요구안을 뽑아냈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시위 형태였다. 훗날 6월항쟁뿐 아니라 촛불시위의 씨앗이 됐다고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당시 보도지침에 얽매인 신문이 시위의 입체적 성격을 지면에 담을 수 없었던 현실은 언론계에서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문제다.
'현재적 의미' 여러계층 공통된 요구안 피력
강압통치 굴하지 않은 경험, 市 자산 삼아야
인천5·3민주항쟁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에 포함되면서 이와 관련된 조사·연구, 계승사업을 중단없이 추진할 동력이 생겼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개정 이후 인천시가 후속 조치를 발표하지 않은 건 아쉬운 대목이다. 인천5·3민주항쟁이 포함된 법 개정이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의 오랜 노력으로 이뤄졌다고 해서 국민의힘 소속 유정복 인천시장이 이를 소홀히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강압 통치에 굴하지 않고 시민 다수가 한뜻으로 광장에 나선 경험을 인천시는 중요한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 민주화운동 기념 공간 건립 사업과 함께 시민 교육의 확대도 필요하다. 특히 민주화운동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이 도시에서 30여년 전 발생한 인천5·3민주항쟁을 이해하도록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개발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부산, 대구 등 타 시·도의 선행 경험을 참조하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인천5·3민주항쟁을 기념하고 계승하는 일에 지역 언론이 담당해야 할 몫도 있는데 그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취재, 보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3과 관련해 이미 드러난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더욱 많기 때문이다.
/김명래 인천본사 기획취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