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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클래식 음악'으로 칭하는 20세기 탄생 작 중 가장 많이 연주되고 청자들로부터 애호되는 음악은 무얼까. 최근 수십 년 동안의 음악계 동향을 살펴봤을 때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작품을 꼽을 수 있겠다. 명확히 가를 수는 없지만 교향곡을 좋아하는 이들은 쇼스타코비치를 선호할 것이고, 피아노곡 애호가들은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더 가까이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생존 시차는 30년 정도고 같은 러시아 태생의 작곡가들이지만 삶의 질곡이 다르다 보니 작풍도 다르고 그에 따라 애호가들의 선호도도 나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두 작곡가 모두를 좋아하는 이들도 상당수이다. 

 

글에선 올해로 탄생 150주년인 라흐마니노프를 조명해 본다.

지난해 6월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 베이스퍼포먼스홀에서 당시 18세의 임윤찬은 포트워스 교향악단(지휘·마린 앨솝)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3번'을 연주했다. 이 곡은 '피아니스트의 무덤'이라 불릴 만큼 고난도 테크닉을 요구하는 작품으로, 임윤찬은 난곡을 완벽히 연주해내며 큰 화제를 일으켰다.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 역사상 최연소 우승자로 등극한 무대였다. 또한 그의 이 라흐마니노프 연주 동영상은 업로드 6개월 만인 올해 초 1천만회가 넘는 조회 수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임윤찬이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리고 있으며, 작곡가의 탄생 150주년을 맞는 올해 라흐마니노프의 이 작품 또한 더 많은 청자와 만나고 있다.

190㎝가 넘는 거구인 라흐마니노프는 유난히 손발이 컸다. 한 손의 손가락을 펼치면 30㎝에 달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그가 작곡한 피아노곡의 스케일 역시 크고 음역이 넓다. 라흐마니노프 작품의 명연들은 작품이 가진 테크닉적 요소와 함께 감정 표현 또한 완벽히 표출하며 청자들을 감동시킨다.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마지막 낭만주의자'
명연들 테크닉적 요소·감정 표현 완벽 표출
'피아노 협주곡 2번' 도입부 우아함 인상적
주관적 정서 환상적 표현에 힘찬 형식 취해

'마지막 낭만주의자'로 불리는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북부 노브고로드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9세 때 가정 경제가 파탄나면서 가족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하지만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는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가르쳤다. 라흐마니노프는 14세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해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음악원에서 그는 단연 두각을 보였고, 졸업식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졸업 작품은 1막짜리 오페라 '알레코'였다.

음악원 졸업 후 피아니스트로 러시아와 유럽에서 연주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24세에 모스크바 시립 오페라하우스의 지휘자, 3년 후엔 런던 필하모닉의 지휘자와 피아노 연주자로 일하며 더욱 유명해졌다. 이후에도 러시아와 유럽, 미국을 오가며 작곡을 했으며,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올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이주해 활동하다가 1943년 캘리포니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1901년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를 세상에 알렸다. 이 곡은 도입부의 장중하고 우아한 타건(打鍵)이 인상적인데 작곡가 사후의 영화와 드라마, CF에 두루 쓰였다. 서정적인 2악장은 에릭 카멘의 팝 명곡 'All By Myself'에 사용됐다.

라흐마니노프는 1906년 드레스덴에 머물면서 '교향곡 2번'을 작곡했고 190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해 극찬을 받았다. 1909년부터 미국 연주 여행을 하면서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작곡했다. 최후의 작품인 '교향적 춤곡'(1940년)은 미국 롱아일랜드에서 작곡됐다.

라흐마니노프가 21세기에도 사랑받는 이유는 무얼까. 우수 어린 멜랑콜리가 곳곳에 스민 그의 음악은 선율 감각이 차이콥스키 못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관적 정서를 환상적으로 표현하면서도 뚜렷하고 힘찬 형식을 취했다. 즉 러시아 특유의 정서와 슬픔이 독일 낭만주의 수법으로 처리되면서 보편성을 확보하고 세계적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라흐마니노프는 당대 서양 음악의 큰 조류였던 국민주의나 모더니즘 음악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음악사의 흐름에 큰 획을 그을 만큼의 비중 있는 작곡가는 아니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