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헹 사건’ 그후 3년… 다시 찾아온 겨울·(中)] 제도 빈틈 속, 속이는 농장주 당하는 노동자
노동부 지침 현장 구속력 낮아 함정
가설 건축물 허용 예외조항도 한몫
비닐하우스 거주 73.9% 집계 설문
“정부·지자체 공공기숙사도 방법”

‘농막 기숙사에서 지내는 것에 불편함이 없고 충분히 만족합니다.’
11월 둘째 주에 찾은 포천시의 비닐하우스 내 컨테이너 기숙사 문 앞에 이 같은 글귀의 서약서가 한국어와 캄보디아어로 적혀 있었다. 비닐하우스 내 컨테이너·조립식 패널 형태 등 가건물을 기숙사로 쓰는 건 엄연히 불법이지만, 이를 아랑곳 않는 사업주(농장주)의 통보와 ‘하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이주노동자의 수용 아래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지난해 캄보디아에서 온 이주노동자 셋은 비전문취업(E-9) 비자를 발급받아 이곳에서 먹고 자고 있다.
3년 전 겨울 포천의 한 비닐하우스에서 이주노동자 속헹이 숨진 뒤 농장주는 원칙적으로 불법 가건물을 기숙사로 제공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를 비웃듯 편법 등이 만연한 탓에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비닐하우스를 벗어나지 못한 채 겨울나기를 걱정하고 있어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8일 고용노동부(이하 노동부) 등에 따르면 노동부는 지난 2021년부터 비닐하우스 내 컨테이너 등 불법 가설 건축물을 이주노동자(E-9, H-2 비자)의 숙소로 제공하는 사업장에는 고용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또 이러한 건축물에서 거주 중인 노동자가 희망할 경우 사용자의 동의를 받지 않고서도 자유롭게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지침을 시행하고 있다.
문제는 노동부 지침의 현장 구속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또한 농장주가 지방자치단체에 ‘가설 건축물 축조 신고필증’을 제출하면 비닐하우스 내 숙소를 제공해도 된다는 예외 조항이 달린 것도 실효성을 낮추는 요인이다. 그나마 가장 최근(2021년)이라 할 만한 노동부의 전국단위 실태조사에서 국내 농축산업 분야 외국인 노동자 1만8천여명 가운데 73.9%가 비닐하우스 등 가설건축물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집계될 정도로 주거여건이 열악했다.

농장주가 노동자를 구해올 때 고용허가 신청서에 숙소 유형을 거짓으로 작성하거나, 처음에 제공하지 않는다고 했다가 말을 바꿔버리는 일도 적지 않다. 보통의 이주노동자의 경우 사업장 변경 등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는 농장주에 비해 을의 입장에 놓인 데다, 국내 물정이 어두워 농장 주변에 숙소를 구하기도 마땅치 않아 불법 기숙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취재진이 이달 초 이천시에서 만난 한 이주노동자의 경우 불법 비닐하우스 안에서 살면서도 농장주가 230만원 남짓의 월급 중 45만원이 숙식비 명목으로 가져갔다. 주변 원룸 등에 비해도 처참한 환경이지만, 별다른 문제제기조차 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이에 대해 정영섭 이주노동자노동조합 활동가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들어온 이주노동자에 대한 기숙사 제공을 의무화하도록 제도가 바뀌지 않는 데다, 지자체에 자율권을 주니 제도적 공백이 발생하는 것”이라며 “사용자의 노력뿐 아니라 정부와 지자체가 예산을 들여 공공기숙사 등을 만드는 정책을 펼치는 것도 하나의 선제적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노동부는 현재 농업 분야 사업장(4천600여개소) 외국인 노동자 주거 환경 조사를 진행 중이며, 공공기숙사 등 예산 반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불법 숙소 거주 여부 등을 포함 외국인 노동자 주거 환경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위반 사항에 대해 지도 점검을 벌일 계획”이라며 “숙소 관련 예산을 확충해달라는 요청도 농림부 등 관계부처에 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