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청자, 조선은 백자.' 상식처럼 통용되지만, 용인 서리 가마터를 통해 고려 백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발견된 용인 서리 가마터는 고려 초기에 생산된 백자와 왕실에서 사용한 제기 등 당시의 다양한 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왕실의 통치철학도 엿볼 수 있어 한국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길이 약 80m, 깨서 버린 도자의 파편이 6m나 쌓여있는 모습으로 보아 한국 도자문화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마터는 불을 땔 수 있는 땔감이 넉넉해야 하고, 도자를 만들 좋은 흙도 쉽게 공급돼야 한다. 이런 조건은 오랫동안 유지하기 쉽지 않아 가마는 쉽게 사라진다. 특히 흙으로 짓는 전통 가마의 특성상 사용되지 않는 가마는 이내 자연에 묻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다는 점을 생각하면 용인 서리 가마터는 전국 어느 유적과 비교해도 큰 가치를 갖고 있다.
1980년대 호암미술관이 3차에 걸쳐 발굴 조사를 진행한 결과로 1989년 사적으로 지정됐으며, 현재도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용인 서리 가마터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할 수는 없다. 경기도의 광주, 이천, 여주 등이 조선왕실과 현대 예술도자의 명성을 획득한데 비해, 용인 서리 가마터가 사적으로 지정된 지도 30여년이 지났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은 문화 행정에서 소외됐던 탓으로 보인다.
용인시가 역사문화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우선 자료들이 필요하다고 판단, 서리 고려백자 요지를 종합적으로 정비하고 지난 2020년부터 새롭게 발굴에 나선 것은 환영할 만하다. 특히 폐기구릉을 본격적으로 발굴하면 유적의 역사적 의미를 재확인할 중요한 단서가 새로 나올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그럼에도 용인 서리 가마터가 전문가 집단의 연구대상으로 머물며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이유는 유적·유물과 관련한 오프라인 시스템의 부재 때문이다. 도시개발이 활발하던 시기 용인이 그랬고, 조사가 진행되는 현재에도 시민들과 유적·유물의 가치를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업이 없다 보니 문화사적 중요한 발견이 시민의 관심 밖에서 겉도는 것이다.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사라진 매장문화재를 생각하면 서리 요지 유적·유물의 가치는 국가적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서리 요지의 보존과 활용 방향을 설정하고 필요 예산 편성에 협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