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진 1세대 한인 자녀도 '귀국허용' 목소리
국내 주거지 충분치 못한것도 해결할 과제
후세들 슬픈 역사 기억 정체성 새기게 될것
정부·사회, 뿌리 잃지않도록 지속 관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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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정 경제부장
광복 70주년이었던 2015년 러시아 사할린에 간 적이 있다.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기 당시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후 돌아오지 못한 한인들을 취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낯선 땅에서 단지 생존을 위해 버텨야 했던 설움, 광복 이후에도 들리지 않았던 고국의 부름, 조국으로의 귀환을 위한 오랜 투쟁과 이산의 슬픔이 켜켜이 쌓여 고스란히 깊은 한이 된 채였다. 사흘 간의 취재 기간 안타까움과 슬픔, 미안함 등으로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여러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며 이야기를 들었던 가운데 가장 큰 충격은 뜻밖의 장소에서 받았다. 사할린 에트노스 아동예술학교에서 4세대 한인 아이들을 만났을 때였다. 검은 머리에 살구색 피부. 일곱살에서 아홉살 사이의 아이들은 한국에서 늘 봐왔던 아이들과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한인들의 아들·딸, 손자·손녀들이 낳은 아이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러분은 한국 사람인가요, 러시아 사람인가요"라는 통역사의 물음에 7명 중 4명은 "러시아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나마 "부모님이 한인이니 나도 한국 사람"이라는 아이들도 "고향은 러시아"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한국말을 사실상 전혀 하지 못했다. 이름도 러시아 이름이었다. 한국 이름을 가진 아이는 3명 뿐이었다. 왜 러시아에서 태어났는지, 한국에 살던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왜 사할린에 오게 됐는지 아이들은 알지 못했다. 부모님이 러시아어를 쓰고 쭉 러시아에서 살아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강제 징용된 사할린 한인들(1세대)은 물론, 그 자녀들(2세대)도 한국으로의 영주 귀국 문제에 매진해왔던 것은 평생 고국을 그리던 부모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인 측면이 크지만 비단 그 때문만은 아니다. 사할린 에트노스 아동예술학교의 아이들처럼 이후 세대의 한인들은 한국을 언젠가 돌아가야 할 조국이 아닌 막연한 조상의 나라, 타국으로 인식한다. 2세대 한인들은 이대로라면 뿌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2세대 한인들마저 세상을 떠나면 영영 한국과는 단절되고, 강제 징용의 역사도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사할린 한인 사회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게 이들의 목소리였다. 한국에서도 제도를 보완해 사할린 한인들과의 연결고리를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으로 1세대 한인들은 물론, 자녀를 비롯한 가족들의 영주 귀국이 제한적이나마 허용된 데 대해 한인들이 호응했던 이유 중 하나다. 영주 귀국을 통해 더 많은 한인들이 같은 '한국인'으로서 인정받고 삶을 영위하는 것, 이는 과거에 대한 보상이나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에서의 삶에 대한 기대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아픈 역사가 지워지지 않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이후 세대에도 꾸준히 이어지는 것. 그런 염원이 반영됐다.

물론 법 시행 이후에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초 귀국 허용 대상은 1세대 한인의 배우자와 직계비속 1명으로 제한돼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면치 못했다. 이에 최근엔 1세대 한인들의 자녀 전체로 대상을 확대하는 것으로 법이 개정됐다. 그러나 이미 숨진 1세대 한인들의 자녀들은 법을 적용받지 못해 사할린 한인 사회에선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영주 귀국을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는 추세다. 귀국한 한인들의 주거지가 국내에 충분히 마련되지 못한 점 등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오른 상태다.

그럼에도 1세대에 이은, 2세대로의 귀국 확대가 사할린 한인들의 정체성을 보다 뚜렷이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에 정착한 2세대들이 늘어나면 이후 세대들이 한국과 교류하는 일도 그에 비례해 증가할 터다. 자연스레 할아버지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왜 한국에서 머나먼 사할린으로 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 슬픈 역사를 기억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새기게 될 것이다. 디아스포라 160주년인 올해, 귀국 제도의 원활한 운용과 더불어 이후 세대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한국 정부와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도 필요하다. 한국 이름이 없는 사할린의 아이들이 적어도 뿌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기정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