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0년대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내세운 철학 관련 책들이 2024년 대한민국 서점가에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극도의 비관론자면서 당시 그의 인생관을 두고 '고통과 좌절밖에 안겨주지 않는다'며 조롱 섞인 비판까지 받았지만, 200년이 지난 현대에 지구 반대편인 한국에서 소환되는 상황이다.
"행복이란 단어를 제거하면 행복할 수 있다.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난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라. 건강해지려는 욕심을 버리고 병에 걸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라. 내가 청년에게 해줄 조언이다."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염세주의 철학은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주류(主流)로 여기던 낙천주의, 행복 철학을 완전히 뒤엎는다. 그가 생각하는 인생은 죽음으로 향하는 계획이며 그 길에는 행복과 기쁨보다는 고통이 더 가득할 뿐이다.
그의 인생관은 대한민국 사회가 직면한 현실이다. 입시와 취업, 승진 등 무한경쟁 굴레 속에 살아온 청년들은 행복보단 불안에 익숙한 세대가 돼버렸다. 자살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1위라는 오명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지난해 말 다시 반등할 것이란 합계출산율은 0.6명대까지 주저앉았다. 미국에서 유행한 '딩크족(맞벌이 무자녀 가정)'은 이제 한국에선 뉴노멀이 됐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내가 경험한 불행과 부담감을 다음 세대에 전가하고 싶지 않아서"가 딩크족이 출산을 거부하는 큰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은 늘 고통에 직면한 청년들에게 일종의 바이블인 셈이다. 내가 느낀 인생의 고통이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느꼈을 때 그들은 안도했고,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선거의 계절이 오고 있다. 정치권은 또다시 혹할 희망찬 미래와 행복들을 열거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고통부터 되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
/고건 정치부 기자 gogosin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