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전우회원 876명 참여
"매일 수십개 관, 점점 무거워져"
48일간 수원연화장으로 340구
"人災 반복… 여전히 책임 부족"
2014년 4월19일 오전 5시께 수원시연화장. 어스름한 새벽녘 군복차림의 남성 30여명이 화장터 입구로 모였다. 하얀 '謹弔(근조)' 완장과 장갑을 각자 집어들고 군복 위에 착용했다.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던 중 멀리서 검은 차량 한 대가 들어왔다. 남성들은 신속히 맡은 자리로 이동해 접근하는 차량에 대열을 갖춰 경례를 하고, 정차한 차량 앞으로 모였다.
차량에서 관을 꺼냈다. 축축한 기운이 느껴졌다. 6명이 겨우 붙어 조심스레 관을 받쳐들고, 발을 맞춰 화장터 내부로 향했다. 그렇게 수원시연화장에 처음으로 도착한 '세월호 참사' 시신 1구가 무사히 화장터로 옮겨졌다. 이날부터 군복의 남성들은 48일 동안, 매일 새벽 5시부터 오후 3시까지, 희생자 시신 총 340구를 운구했다.
9일 만난 이병근 수원시해병대전우회(이하 전우회) 회장은 당시 전우회 사무국장으로 시신 운구현장을 지휘했던 경험을 생생히 떠올렸다. 이 회장과 함께 운구를 도운 전우회원은 모두 876명이다. 이들은 수원지역에 거주 중인 해병대 전역자들이었는데, 생업에 있음에도 시간을 할애해 화장터 인력 공백이 없도록 교대로 자리를 지켰다.
팽목항에서의 수색작업과 구조 현황에 이목이 쏠렸을 당시, 전우회는 하루에도 수십명씩 인양되는 희생자들의 마지막 길을 조용히 책임졌다. 시신은 오랫동안 침수됐던 만큼 나날이 무거워지고 부패 정도가 심해졌다.
이 회장은 "180㎏ 고무보트를 운반하는 훈련도 거뜬히 소화한 남성들인데, 점점 무거워지는 관을 매일 수십개씩 옮기는 데다 하나하나 예를 갖춰야 하는 만큼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고 회상했다.
고된 기억이지만 이 회장은 "위급할 때 똘똘 뭉치는 해병대 정신으로, 전우회가 당연히 나서야 할 일이었다"고 강조했다. 전우회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원시 및 관내 소방서, 경찰서 등과 공조하며 위급상황에 인명 구조활동이나 사체 인양작업 등 인력을 지원하고 있다.
다만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화장터에서 만난 한 여학생의 모습은 이 회장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단원고 교복을 입고 화장터로 달려온 학생은 군복차림의 그에게 다가와 "군인 아저씨, 어른들 좀 혼내달라"며 울며 토로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세월호 참사 이후로도 '인재(人災)'로 인해 반복되는 참사들을 두고 어른들의 책임 있는 자세가 부족하다고 개탄했다. 그는 "감정을 숨기고 자리를 지켜야 했음에도 여학생의 말은 듣는 순간 자식 가진 입장에서 너무 속상하고 울컥했다"며 "어떤 참사든 결국 책임이 있는 관리자가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구성원의 생사가 결정된다. 어른들의 책임 지는 자세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했다.
/김산기자 mountai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