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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연 문화체육부 기자
기자가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 목소리를 들어줘야 할 소수자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사회가 허용하는 다양성의 울타리는 높은 인권 감수성을 지닌 올바른 다수자가 상상하는 범위 내에 있기 마련이다. 빈곤층, 성 소수자, 이주민…. 흔하게 사용하는 다양성이란 단어는 기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보다도 좁은 셈이다.

괜스레 고민을 떠올린 건 기획 취재를 하다 헷갈리는 순간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내기 힘든 사람이 아닌 이들, 이른바 '부르주아 소수자'를 마주하면서다. 난치병과 함께 살아가는 어느 중산층 가정, 그리고 '돈 많은 페미니스트의 걱정'이라는 거대 담론. '먹고사니즘'이라는 필터로는 걸러지지 않는 존재다.

물론 당연히 부자도 소수자일 수 있다. 문제는 그 속에서 사회적인 의미를 어떻게 찾아내느냐다. '돈만 있으면 되지 뭐가 문제야…'. 쉬운 방법은 약자성을 찾는 것이다. 가족 간병을 취재하며 만난 한 중산층 가정은 경제적 위치와 무관하게 '시간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반면 어느 '돈 많은 페미니스트의 걱정'에서 뻗어간 취재는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성 소수자에 대한 포용성이 높은 동시에 보수의 경제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은 대체 어느 정당에 투표해야 할까. 그럼 반대로 왜 '여자 이준석'은 없을까. 여기서 시작한 문제의식이 '20대 무당(無黨)'이라는 현상으로 수렴했다. 정치적 발언을 꺼리고,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문제적 정체성'. 거대 양당은 물론 개혁신당도 정의당도, 저널리즘도 풀지 못하는 난제다.

어쩌면 난제를 대하는 태도에 실마리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애초에 소수자의 범위는 없었던 거다. 다양성은 정도(正道)를 '찾아가는 일'에 있지, 그 정도가 무엇인지 '규정해버리는' 순간 망가지고 만다.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머리를 싸매고 정도를 고민하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 아닐까. 싱겁지만, 싱거워야만 하는 결론이다.

/유혜연 문화체육부 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