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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일본은 니가타현 사도광산을 에도시대부터 1900년대까지 금·은 등 주요 자원을 채굴하는 재정원으로 활용했다. 이 광산이 최근 한국, 일본 정부 간 외교관계는 물론 시민사회 의제에서 화두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일본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작업이 시작되면서다.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의 유산 등재 대상 기간을 16~19세기 중반으로 한정한 게 발단이 됐다. 일본은 사도광산 운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39년부터 수년간 조선인 노동자 1천여명을 강제 동원했는데, 이 기간을 제외하면서 의도적으로 징용 역사를 배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사도광산 노동자로 조선인을 징용한 근거는 니가타현 역사서와 일본 시민단체 조사 자료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니가타현은 1988년 펴낸 역사서에서 '(조선인) 노무동원 계획은 명칭이 변하지만, 조선인을 강제 연행했다는 사실은 동일하다'고 기록했고, 교도통신은 지난 6일 이 내용을 인용 보도했다. 지난달 유네스코 자문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범위를 사실상 일제강점기 강제노동이 이뤄진 시기를 포함한 전체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심사 결과를 내놓았다. 한국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지만, 일본 정부가 지금껏 고수해온 입장을 선회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일본 정부가 외면하고, 지우려는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다.

일본 사도광산과 같이 인천 부평에는 조선인 강제동원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관통하는 근대건축물이 곳곳에 남아있다. 일본육군조병창(일본군 군수공장) 시설물, 미쓰비시 줄사택 등이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실체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부평에 남은 근대건축물들은 역사·사회적 가치에 앞서 환경 정화, 편의시설 조성을 위한 존치·철거의 대상으로만 재단되고 있다. 이같은 관점으로만 공간의 활용 방안을 정하기에는 너무 큰 가치를 간과하고 있다. 남아있는 근대건축물을 통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할 아픔을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박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p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