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혜석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미술 작품뿐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통찰을 비롯해 역사 그 자체가 된 굴곡진 삶까지. 2000년대 초반 재조명 움직임을 거쳐,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 리부트와 맞물려 흐름을 탔다. 그렇게 나혜석은 수원시에도, 여성들에게도 자부심 가득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1% 아니, 99%가 부족하다. 나혜석을 끄집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딱 거기까지다. 조선 최초의 여성 유학생,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최초' 타이틀만 돌림노래처럼 반복된다. 보도 위 타일은 깨지고 비석 속 글씨는 알아보기 힘든, 유흥가 한복판에 자리한 나혜석 거리의 모습은 이런 현실을 은유한다. 다만, 거리 재정비가 시급하다는 일차원적인 소리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혈세는 더 가치 있는 데 쓰여야 하기 때문이다.
눈여겨봐야 할 사연들이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 파리에 거주하는 한경미 감독은 정부·지자체의 아무런 지원 없이 홀로 취재에 나서 나혜석의 파리 유학 시기가 담긴 사진을 발굴했다. 그런가 하면 1947년의 나혜석을 기억하는 인물이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보 쉬르 센에 살고 있다. 이응노 선생의 아내, 박인경(98) 화백이다. 과거 나혜석이 하숙했던 르 베지네에 자리한 푸셰씨의 집은 아직 평범한 가정집이다. 이곳은 유명 예술가가 살았다는 문패를 걸 자격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보다 다양한 관점으로 새롭게 연구해야 할 것도, 오늘날 우리가 토론하거나 기념해야 할 것도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나혜석의 도시'가 잊고 있는 영광스런 몫이다.
/유혜연 문화체육부 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