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등재 홍보물 곳곳에 전시
10℃까지 내려간 춥고 습한 현장
전시실 속 ‘모집’ ‘돌아갔다’ 표현
조선인의 자발적 노동 암시하는듯
양국, 동원 역사 담긴 내용 협의했지만
‘강제’ 표현 누락된 박물관 전시물 논란
지난 2일 찾은 일본의 니가타현 사도섬 내에 위치한 사도광산. 인근 주차장부터 광산 입구까지 “세계문화유산 사도금산(광산), 역사와 문화와 사람과 자연이 공생하는 지속 가능한 섬”이라고 일어로 적힌 현수막이 10m 간격으로 설치돼 있다.
‘Sado Island Gold Mine’이라 적힌 대형 관광버스가 매표소 앞으로 정차하자, 20여명의 관광객들이 쏟아져 내린다. 이들은 매표소 곳곳에 붙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자축의 금색 홍보물을 거쳐 갱도 입구로 들어간다.
제주도의 절반 크기면서 5만명이 거주하는 사도섬에는 일일 1천명이 여객선을 통해 방문한다. 지난 7월 27일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되면서 8월 한달 간 6천명이 방문할 정도로 발길이 늘었다는 게 현지 관계자의 설명이다.
문화유산 등재 이후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인 현장이지만, 국내에서 제기된 반발이자 일본이 후속 조치로 약속한 ‘강제동원(強制動員)’의 역사적 흔적은 광산 내부에서 찾기 어려웠다.
광산 입구, 소다유(宗太夫)와 도유(道遊 )등 두갈래로 나눠진 갱도 입구 중 근대기인 메이지(1868~1912년) 시대 이후 지어진 도유 갱도로 들어갔다. 일제시대인 1930년대부터 대거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노역을 이어온 곳이다. 일본 측이 현지에서 공개한 자료만 봐도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도유갱도에 일한 한반도 출신 노동자는 1천500명이 넘는다.
이날 25℃의 날씨였지만, 갱도 안에 들어서자 10℃까지 주저앉은 차갑고 습한 공기가 엄습했다. 100m 이상 긴 갱도에는 이곳에서 금이 얼마나 발견됐는지와 갱도 관리 및 현대화의 과정, 제련의 방법 등이 자세히 기술된 표지판이 10m마다 설치돼 있다.
1.5km로 이어지는 도유갱도 내부 관광코스에서 조선인의 노동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건 오직 ‘메이지 시대 초기의 운영 체제’이라는 제목의 표지판에 적힌 ‘고용 외국인(御雇外国人, Foreign Engineers)’ 문구뿐이다.
통로에 설치된 스피커에선 ‘사도광산은 최첨단 기술과 외국인 기술자가 투입돼 일본 근대화의 선구가 됐다’ 등의 성과를 자축하는 방송만 반복해 흘러 나왔다.
갱도를 빠져나와 출구 옆 ‘기계공장전시실’이란 곳에 들어서자, ‘조선인’이 유일하게 언급된 2가지의 기록이 한쪽 벽면에 기록돼 있다.
‘1939년(쇼와14년), 노동동원계획으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일본으로의 모집을 시작했다’, ‘1945년(쇼와20년 9월) 패전에 따라 조선인 노동자가 조선으로 돌아갔다’.
일본 측이 공개한 자료엔 ‘모집’과 ‘돌아갔다’ 등 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모습에 자발성이 느껴지는 단어들로 채워졌다.
사도광산을 찾은 일본인 쿠보다(51)씨는 “뉴스에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을 듣고 도쿄에서 4시간 넘게 걸려 이곳에 왔다”면서도 “조선인 강제노동에 대해선 잘 모르고, 정치적 이슈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가장 큰 쟁점은 일본이 한국인의 ‘강제동원( 制動員)’ 사실을 인정하냐는 점이다.
국내 야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과 역사학계는 일본 정부가 강제노동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등재 결정과 함께 약속한 후속조치들에 대해 지지부진하다고 반발하는 중이다.
사도광산, 유네스코 왜 등재하려 했나
일본은 사도광산을 메이지시대 산업혁명 유산의 상징으로 남기고, 그 역사를 인정받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몰두했다.
사도광산이 한때 전세계 금 생산량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대형 금산이란 점과 전통적 수공업을 사용한 점 등을 어필하며 2006년부터 등재에 시도했다. 2010년 잠정 등재 목록에 들었고, 2021년 일본 문화심의회는 국내 추천 후보로 선정했다.
결국 지난해 1월 유네스코에 추천서를 제출했지만, 지난 6월 유네스코 자문기관인 ‘국제 기념물 유적 협의회(ICOMOS)’는 ‘보류’ 결정을 내렸다. 조선인 강제노역 기간 등이 포함된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를 현장에 설명하고 전시하라는 게 보류 권고의 내용이다.
이후 일본과 한국 정부 간의 협의가 진행됐고, 외교부가 “일본이 권고를 성실히 이행하고, 이를 위한 선제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전제로 등재에 동의했다”며 조건부 동의를 발표했다.
한국의 동의 직후 지난 7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사도광산은 지난 2015년 등재된 군함도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인의 강제동원의 역사가 담긴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일본의 약속, 얼마나 지켰나
2일 사도광산에서 2km 정도 떨어진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을 찾았다. 조선인 노역 역사가 담겨 일본이 권고 이행의 대표적 사례로 내세우는 곳이다.
박물관 입구로 들어서자 1층은 거대한 지도와 전시품, 연혁과 사진 등 사도광산 발전에 기여한 내용과 지역 역사로 가득 채워졌다. 1층을 지나 3층까지 이어지는 좁고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한국인 노동자 기록이 있는 전시실이 나온다.
6평 남짓의 전시실엔 유일한 유물인 갱도에서 발견된 조그마한 나무 도시락통과 관련 기록이 전시돼 있다. 연도별로 조선인 노동자의 이력이 정리된 패널엔 이렇게 적혀 있다.
“1938년 4월에 공포됐고 동법에 근거한 국민징용령이 이듬해 7월에 시행됐다. 1939년 9월에 ‘모집’이, 1942년 2월에 ‘관 알선’이, 1944년 9월에 ‘징용’이 한반도에 도입됐다. ‘모집’은 민간 고용자의 책임하에 일본이 조선반도에 설치한 행정기구인 조선총독부의 인허가를 받은 뒤에 노동자를 채용하는 구조다…”
이처럼 박물관엔 노동자들의 동원 과정 등이 공개되며 일본이 조선인 동원의 역사에 대해 기술하려 부분적으로 노력한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강제( 制)’라는 명시적 표현이 누락된 걸 두고 국내와 해석이 엇갈리며 논란은 이어지는 상황이다.
진행 중인 역사 논쟁, 앞으로의 과제는
지난 7월 27일 유네스코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등재 결정할 당시 가노 다케히로 주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두 가지를 약속했다. 한국과 긴밀한 협의 하에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를 전시하는 것과 사도광산 노동자들을 위한 ‘추도식’을 매년 개최하는 사안이다.
논란 속에 전시관은 공개됐지만, 여전히 추도식은 지지부진하다. 본래 8월 추진을 약속했지만, 일본 외무성은 최근 10∼11월로 추도식 날짜를 미뤘다.
이날 日언론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신임 일본 총리가 내주 라오스에서 열리는 아세안(ASEAN) 관련 정상회의에서 정상회담을 진행한다.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관련 국민적 여론이 여전히 나뉘는 만큼, 한일 정상 간의 만남에서 유네스코의 권고 이행과 강제동원 표기 등 유의미한 해법이 논의될지 이목이 집중된다.
일본 오사카에 30년 이상 거주 중이며 이날 사도광산을 찾은 김창현(가명·66)씨는 “일본 현지에선 사실 한국인 강제동원의 역사에 대한 인식도 적고, 한국에서 이같이 논쟁이 큰 사안이라는 것도 잘 모르는 상황”이라며 “특히 강제성 없이 임금을 지급한 고용이라고 알고 있는 일본인도 많다. 이미 문화유산 등재는 됐지만, 한일 양국의 발전을 위해 역사 논쟁이 마무리될 합의점이 나오면 좋겠다”고 말했다.